사도행전묵상일기 187 - 당신의 회복탄력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2026. 5. 8. 05:00묵상하는말씀/사도행전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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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18~20   두 사도는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사하지 못하게 겨우 말렸다. 그런데 유대 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거기로 몰려와서 군중을 설득하고, 바울을 돌로 쳤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그를 성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제자들이 바울을 둘러섰을 때에, 그는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부모님의 품은 언제나 완전하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고와 눈물이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이미 곁에 계시지 않은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분들에게도 주님의 따뜻한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모두가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을 흘려보내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언제 실감하십니까? 저는 아침에 거울을 볼 때 그럴 때가 있습니다. 자고 일어났는데 베개 자국이 얼굴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젊을 때는 금세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는 한참을 지나도 그대로 있습니다. 피부의 탄력이 떨어진 것이죠. 회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에도 탄력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릅니다. 살면서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빨리 다시 일어나느냐입니다. 얼마나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느냐입니다. 그것이 내 영혼의 나이를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참 기막힌 일을 겪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떠받들었습니다. 바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을 헤르메스라 부르며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선동이 들어오자 순식간에 돌변합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돌을 던집니다. 참 무서운 변덕입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이 며칠 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예루살렘 군중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오래전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간사함이 있습니다. 기도가 내 뜻대로 응답되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내 뜻과 다르게 흘러가면 금세 원망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다가도 작은 상처 하나에 마음이 닫힙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다가도 내 기대가 무너지면 돌을 듭니다. 군중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도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돌에 맞아 쓰러집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냅니다. 이것은 바울의 작은 십자가 사건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바울도 복음 때문에 성 밖으로 버려졌습니다. 사람의 배신과 폭력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바울 곁에 둘러섰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일어났습니다. 이것도 놀랍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바울은 일어나자마자 다시 그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자신을 돌로 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말이죠. 배신과 죽음의 공포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저 같으면 다시는 그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무서웠을 것입니다.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시 들어갑니다. 성경은 그가 들어가서 무엇을 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들어간 그 발걸음 자체가 이미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두려움에 묶이지 않았습니다. 억울함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에 끌려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정이 없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영적 회복탄력성입니다.

우리는 한 번 상처를 받으면 오래 붙들고 삽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를 며칠씩 곱씹습니다. 억울한 일을 몇 년씩 품고 삽니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줄 알면서도 미룹니다. 용서해야 할 줄 알면서도 버팁니다. 회개해야 할 줄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돌아서지 못합니다. 그렇게 미루는 동안 우리 영혼은 굳어집니다. 고집이 세집니다. 잘 변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이 영적 노화입니다.

회개는 빨리 돌아서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회개를 메타노이아라고 합니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사과도 빠를수록 좋습니다. 용서도 빠를수록 좋습니다. 미루면 마음이 굳습니다. 굳어진 마음은 쉽게 부러집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은 다시 살아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회복탄력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화낼 수 있습니다. 서운할 수 있습니다. 짜증 내고 투정 부릴 수도 있어요.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오래 머물지는 마세요. 잘못을 깨달았다면 빨리 돌아서세요. 넘어졌다면 툭툭 털고 일어나십시오. 두려움이 있다면 주님께 맡기세요. 미움이 있다면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세요.

고린도후서 4장 16절은 말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육체의 탄력은 세월과 함께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탄력은 은혜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상처보다 은혜에 더 빨리 반응하십시오. 미움보다 사랑으로 더 빨리 돌아오십시오. 두려움보다 사명의 자리로 더 빨리 나아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젊고 눈부시게 새롭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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