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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열왕기상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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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엄마의 영성을 먹고 자랍니다 열왕기상 22:41-53 자녀는 엄마의 영성을 먹고 자랍니다. 오늘은 열왕기상의 마지막 본문입니다.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이야기와 북이스라엘의 왕 아하시야의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제 눈에는 묘하게도 이 두 왕이 대비되어서 기록된 것처럼 보이네요. 여호사밧은 히스시야, 요시야와 함께 남유다의 3대 선한 왕으로 꼽을만한 인물이죠. 그에 비해 아하시야는 자신의 아버지 아합을 능가하는 악한 왕으로 기록됩니다. 물론 완전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겠죠. 여호사밧 또한 그 안에 실수와 실패들이 존재합니다. 오늘 뜬금없어 보이는 다시스 선단 이야기도 어쩌면 그의 약한 부분에 대한 지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사밧의 화친정책 때문이죠. 우리는 이미 솔로몬에게서 배웠는데요. 그에게 평화는 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딱 한 가지 중요한 실력이 필요합니다 열왕기상 22:24-40 그리스도인에게는 딱 한 가지 중요한 실력이 필요합니다. 아합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엘리야가 그런 사람이었죠. 아합은 엘리야를 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왕상18:17)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이번에는 미가야입니다. 미가야에 대한 아합의 인식은 이렇습니다. 왕상22:4, "주님의 뜻을 물어 볼 사람으로서,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고 하는 예언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나는 그를 싫어합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무엇인가 길한 것을 예언한 적이 없고, 언제나 흉한 것만 예언하곤 합니다." 아합에게 반항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언자라는 사람들조차 그것도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똘똘뭉쳐서 아합의 뜻을 따라 움직였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눈에 ..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열왕기상 22:10-23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다수결의 힘을 아시죠? 다수결의 원칙은 민주사회에서 의사결정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 원칙은 다수의 의견이 더 합리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조금 양보하여 다수의 의견이 합리적이기 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수결 원칙은 대화와 타협의 정신에 근거한 사회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원칙에 입각하여 선거도 합니다. 단 한 표라도 더 나온 사람이 선출되는 것이 다수결 원칙입니다. 다수결의 힘은 비단 사회 제도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도 다수결의 힘이 작용을 합니다. 마치 더 많은 사람들이 먹고, 더 많은 사람들이 사서 쓰는 것이, 더 좋고, 더 나은 것처럼 느낍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더 ..
"이 밖에 내가 만나 볼만한 나의 자녀가 또 없느냐?" 열왕기상 22:1-9 "이 밖에 내가 만나 볼만한 나의 자녀가 또 없느냐?" 북이스라엘과 시리아는 늘 앙숙이었습니다. 고대시리아는 페니키아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죠. 히타이트와 아시리아로 이어지는 고대 강대국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제국에 의해 멸망하는데요. 성경에 나오는 아람사람이 곧 시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쓰는 아람어는 예수시대 이스라엘의 통용어이기도 했습니다. 늘 견원지간이던 이들이 모처럼 평화스러웠습니다. 그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이 만났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한 것이죠. 그 회담에서 북측 아합왕은 남측 여호사밧왕에게 제안을 합니다. 길르앗 라못이라는 곳을 뺏어오자는 것이죠. 길르앗 라못은 갈릴리호수 아래로 흐르는 요단강의 동편에 있는 땅입니다. 본래 가나안 정복시절..
"자신의 가치를 팔아서 무엇을 사는가?"가 바로 나의 인생이 됩니다 열왕기상 21:17-29 "자신의 가치를 팔아서 무엇을 사는가?"가 바로 나의 인생이 됩니다. 마태복음25장을 보면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에게 맡긴 각각의 달란트를 나중에 와서 결산한다는 내용의,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본문이 참 많이 불편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인이 종에게 준 달란트가 각기 달랐다는 것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이는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시는 것이 불공평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가장 적게 받은 종의 결과는 그 불공평해 보이는 불만에 더욱 부채질을 합니다. "나도 많이 받았다면 많은 결실을 할 수 있었을거야!"라는 비교의식이 어디서부턴가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제 눈에는 늘 주어지는 공평에 대한 시각..
말씀을 품으면 말씀이 자라고 욕심을 품으면 탐욕이 자랍니다 열왕기상 21:1-16 말씀을 품으면 말씀이 자라고 욕심을 품으면 탐욕이 자랍니다. 우리는 늘 자신에게 있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죠. 이것을 성경은 탐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각각의 달란트와 환경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것을 주시고, 또 적절한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의 것을 더 부러워하고, 남의 손에 있는 것을 더 바라며 삽니다. 바울은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남의 것을 더 탐내는 우리의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나의 재능보다 남의 재능이 더 좋아 보이고, 내가 해야 할 일보다 남이 하는 일이 더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남이 하..
나에게 믿음이 있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0:31-43 나에게 믿음이 있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처럼 쉽게 사용하고 쉽게 이해되지만, 또한 믿음처럼 그 뜻이 완전히 왜곡되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영적단어도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늘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마치 믿음이 영적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물리적 도구처럼 사용되어 왔죠. 물론 믿음이 모든 영적 흐름의 기초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이, '역사하는 힘'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도, 믿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의 긍정이나 부정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이 제한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단지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응답과 은혜가 있다는 것과, 내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누린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열왕기상 20:1-30 나에게 좋은 응답과 은혜가 있다는 것과, 내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누린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어떻게 입증할 수 있으신가요? 보통은 나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나 축복이 임할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죠.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의학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부러워지죠. 나에게도 그런 기적이 있기를 바라고, 그런 특별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기를 늘 바라죠. 그런데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은 믿는 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십자가를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은 믿는 자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