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묵상일기 184 - 갈망이 곧 기도입니다.

2026. 5. 5. 05:00묵상하는말씀/사도행전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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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8~10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되어서, 걸어본 적이 없었다. 이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바울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알고는, 큰 소리로 "그대의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걷기 시작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어린 생명들을 축복하는 날입니다. 아이들은 미래의 주인공이기 전에 오늘의 소중한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의 모든 아이들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라게 하시고, 사랑받는 기억이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 뿌리내리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어른들도 아이들을 통해 순전한 믿음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에도 웃고, 사랑받으면 금세 마음을 여는 아이들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맑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기를 축복합니다.

이고니온에서 핍박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루스드라입니다. 이고니온에서 남서쪽으로 약 32km 떨어진 도시입니다. 훗날 바울의 영적 아들이자 평생의 동역자가 되는 디모데의 고향이기도 하죠. 

바로 이곳에서 바울은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자기 힘으로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죠. 삶의 많은 가능성이 처음부터 닫힌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사회적 시선도 차가왔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문화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는 철저히 버려진 잉여 인간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아니 오히려 있으면 더 거북한 그런 존재였죠.

그런데 바울은 그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바울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고 말합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못 걷는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장면과 닮았습니다. 믿음의 눈은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긍휼의 눈은 사람을 배경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깊이 바라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형편을 넘어 영혼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은 차별없는 존중입니다.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죠. 바울은 그 짧은 눈맞춤 속에서 이 사람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본 것일까요? 이 사람에게서 어떤 믿음의 증거를 보았을까요? 성경은 그 단서를 아주 평범한 문장 속에 숨겨 둡니다.

“이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여기서 '들었다'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에쿠엔'입니다. 이는 한 번 스치듯 들었다는 과거형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는 뜻의 미완료 시제입니다. 그것도 흘려들은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마음에 간직했다는 뜻입니다. '에쿠엔'에는 소유의 개념이 담겨있기 때문이죠. 그는 바울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래서 놓치지 않으려 그가 말씀하는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의 몸은 불편했지만, 그의 마음은 말씀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바울이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계속 설교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장소를 옮겨가며 여러 곳에서 사람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걷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요? 어쩌면 그는 불편한 몸을 흙바닥에 끌면서라도 바울의 말을 따라갔을지 모릅니다. 더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가장자리라도 붙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그의 영혼은 간절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눈빛을 본 것입니다. 갈망이라는 이름의 믿음을 본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듣는다고 다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갈망하며 들어야 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소리를 듣듯 들어야 합니다. 병든 사람이 살 길을 찾듯 들어야 합니다. 루스드라의 그 사람은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 지독한 갈망이 말씀을 붙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들음이 기적을 부르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미 우리는 지난 주 한 차례, 갈망에 대한 묵상을 나눈 바 있습니다. 또 다시 우리에게 갈망에 대한 메시지를 주시는 것을 보면 우리 공동체에 갈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주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쩌면 갈급함을 잃은 신앙은 빛을 잃은 신앙과도 같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갈급함을 잃은 마음은 주님의 일하심도, 주시는 은혜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타까움에 주님은 오늘 우리 공동체에게 다시금 문을 두드리시는지도 몰라요.

에베소서는 “세월을 아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시간을 아껴 쓰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주어진 기회를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건져 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갈망하는 자만이 오늘 내게 주어지는 은혜의 기회를 대가를 치러서라도 쟁취합니다. 갈망이 사라지면 은혜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 없이 주어지는 은혜는 없습니다. 더 나은 오늘에 대한 기대와 갈망 없이 저절로 열리는 미래란 없습니다. 갈망이 곧 기도입니다. 내 마음속에 영적인 갈망이 메말라 있다는 것은 심각한 경고입니다. 곧 내가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해 진짜 기도를 드리지 않고 있다는 뜻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곳으로 걸어가게 됩니다. 내 시선과 갈망이 머무는 곳이 곧 나의 미래가 됩니다. 그러니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이나 부정적인 현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오늘 하루, 루스드라의 그 사람처럼 흙바닥을 기어서라도 생명의 말씀을 향해 다가가려는 그 거룩한 갈망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매일매일 간절함으로 말씀을 대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여러분의 일상을 기적과 감사로 채워내는 참된 동력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https://youtu.be/oHVRZwul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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