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묵상일기 106 - 용서가 우리의 지평을 넓힙니다.

2026. 1. 26. 05:00묵상하는말씀/사도행전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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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17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1월의 마지막 월요일 아침입니다. 꽉 닫힌 창문을 열어 묵은 공기를 내보내고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듯, 오늘 우리의 마음 빗장을 열어 주님의 따스한 용서와 사랑을 깊이 들이마시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합리적인 의문을 자아냅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아나니아를 보내셨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엘리사를 통해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요단강 물로만 낫게 하셨으며, 예수님은 백부장의 하인을 가서 만지지도 않으시고 말씀만으로 고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환상 중에 “사울아 눈을 떠라” 말씀하시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사울이 가장 잡아가고 싶어 했던 표적이자, 반대로 사울을 가장 두려워했던 사람인 ‘아나니아’를 심부름꾼으로 보내십니다.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단순히 사울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의료적 기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보다 더 어렵고 위대한 관계의 기적을 원하셨습니다. 이미 묵상했듯,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처음에는 작은 반항을 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이 머무는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얹으며 내뱉은 그의 첫마디가 역사를 바꿉니다.

“형제 사울이여 (Brother Saul).”

이 말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내 마음의 원수요, 살인자이자, 상종 못 할 공포의 대상을 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위대한 용서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눈을 뜨게 하는 것보다, 아나니아의 닫힌 마음을 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기 전, 먼저 아나니아의 마음에서 미움과 두려움의 비늘이 벗겨졌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여”라고 불렀을 때, 사울의 몸에 서려 있던 살기도 씻겨 나갔지만, 동시에 아나니아의 마음에 있던 적의와 두려움도 깨끗이 씻겨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형제애가 채워졌습니다. 원수가 가족이 되는 순간, 복음의 막힌 담이 무너지고 아나니아의 영적 지평은 사울을 품을 만큼 넓어졌습니다.

만약 아나니아가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울은 눈을 떴을지 몰라도, 다메섹 교회에 결코 융화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갈 곳 없는 외톨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나니아의 포용이 있었기에 사울은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훗날 ‘바울’이라는 위대한 전도자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의 지평을 넓히는 일입니다. 내 마음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원수까지 품을 때, 나의 영향력은 확장됩니다. 더 많은 내 편을 만들고, 더 큰 축복을 담으려면 용서라는 그릇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의 영향력은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만 미치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울’은 누구입니까? 오늘 그 사람에게 마음으로나마 “형제여”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진정한 승리는 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링컨의 말처럼 적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용서를 통해 우리의 삶과 신앙의 지평을 넓히십시오. 더 많은 영혼을 품을 줄 아는 자가 결국 승리합니다.

https://youtu.be/4HjoJC04y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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