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묵상일기 370 - 우리 믿음의 최종 목적지는 용서입니다.
2025. 8. 17. 14:26ㆍ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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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23: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용서, 인류의 풀리지 않는 숙제
오늘은 [우리 믿음의 최종 목적지는 용서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려 말씀을 우리 삶의 이정표로 삼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오래전에 가슴이 저린 다큐멘터리를 하나 보았습니다. 제목이 [As We Forgive] 우리 말로는 ‘우리가 용서한 것처럼’ 정도 되겠네요. 이 다큐멘터리는 "당신은 당신의 가족을 살해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며 시작합니다. 1994년 르완다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100일동안 약 100만 명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비극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고 있죠. 이야기는 샨탈과 로사리아라는 두 여성을 중심으로 펼쳐지죠. 그들은 대학살로 인해 가족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잃은 이들입니다. 그런데 르완다 정부는 국가적 화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수만 명의 학살 가담자들을 석방하여 원래 살던 마을로 돌려보냅니다. 이로 인해 대학살의 생존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와 이웃으로 마주해야 하는, 참담하고 기막힌 현실에 놓이게 되죠. 영화는 피해자들이 가해자들과 직접 대면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피해자들은 분노와 증오, 슬픔을 터뜨리지만, 동시에 신앙에 의지하여 용서를 시도합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의 아픔을 직접 마주하며 비로소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깊이 깨닫게 되죠. 이 과정은 단순한 감정의 해소가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그려집니다. 그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런 말이 나와요. ‘진정한 용서는 정의를 넘어선다.’고요. 법적인 처벌, 그러니까 응보적인 정의만으로는 결코 공동체가 회복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용서는 정의를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는 과정임을 알려주죠. 그것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용서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떨쳐내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고, 잊으려 할수록 더 또렷하게 떠오르는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그 미움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이해할 수 없고, 가장 위대한 용서의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자신을 조롱하고 침 뱉고, 결국 죽음으로 내모는 사람들을 향해, 그 고통의 정점에서 그는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체념이나 포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최종 선언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믿음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정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용서가 무엇이며,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하고, 그 용서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될 참된 자유는 무엇인지 함께 나누며 은혜받기를 소망합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 기억을 끌어안는 의지적 결단
우리는 흔히 용서를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상처 준 사람이 밉지 않게 느껴지고, 분노가 사라져야만 비로소 용서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성경이 말하는 용서, 특히 예수님이 보여주신 용서는 감정의 차원을 넘어선 의지적 결단입니다.
현대 신학자 중 예일대학교의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교수는 그의 저서 『베풂과 용서』에서 용서를 매우 탁월하게 정의했습니다. 그는 용서란 "잘못된 일을 잊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복수할 나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아픈 기억을 억지로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끌어안은 채로, 복수 대신 사랑을 선택하는 능동적인 행위라는 것이죠.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함과 죄악을 정확히 보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모른 척하거나 잊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실체를 아시면서도, 그들을 향한 심판과 저주가 아닌 '용서'를 아버지께 간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본질입니다. 나의 아픔과 상대의 잘못을 명확히 인지하되, 그것에 매여 사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 사랑의 관점으로 그를 다시 바라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라"(마태복음 18:22)라고 답하셨습니다. 이것은 숫자를 세라는 의미가 아니라, 용서가 우리의 계산과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임을,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해야 할 우리의 의지적 실천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왜 용서해야 하는가? - 자유를 향한 유일한 길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용서해야만 할까요?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먼저 용서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기억하실 겁니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라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있었습니다. 그는 죽을 목숨을 건진 것이나 다름없었죠. 하지만 그는 길을 가다가 자신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자, 그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크게 노하며 그를 다시 옥에 가두며 말합니다.
마태복음 18:32-33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 비유는 우리에게 너무나 명확한 진리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는 일만 달란트와 같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빚을 대신 갚아주셨습니다. 이 엄청난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찌 다른 사람의 작은 빚, 백 데나리온의 상처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관대하고 착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받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용서에 대한 당연하고도 마땅한 응답인 것입니다.
둘째,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의학적으로도 용서의 효과는 이미 널리 증명되었습니다. 하버드 의대의 조지 베일런트(George Vaillant) 교수는 "용서는 과거의 고통을 제거하지는 않지만, 미래의 고통을 제거한다"고 말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즉 원한과 분노는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끊임없이 갉아먹습니다. 혈압을 높이고, 심장에 무리를 주며, 깊은 우울감과 불안에 시달리게 합니다. 마치 독을 품고 있으면서 상대방이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상처받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성공회 최초의 흑인 주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즈먼드 투투 주교는 용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용서는 단지 이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기심의 최선의 형태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회복성을 발현해 주기 때문에 비인간화되려는 모든 노력에 반하여 여전히 인간으로서 남을 수 있게 합니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극심한 인종차별 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죠. 얼마나 인종차별이 극심했냐 하면, 인종차별 반대를 주장하다가 경찰에 의해 30세 청년이 목숨을 잃자, 법을 책임지는 법무부 장관이 “그까짓 검둥이 하나 죽어봐야 그것은 내가 걸린 감기 이상의 고통도 주지 못한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장례식에서 투투 주교는 분노한 흑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인간성을 잃어가는 백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도 인간임을 알려 줍시다.”
최근 한 심리학 연구 영상을 보니,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심리적 안정감이 높아지고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낮아진다고 합니다. 심지어 면역 체계까지 강화된다고 하니, 용서야말로 "이기심의 최선의 형태"라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관용이기 이전에, 나 자신을 미움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과거의 상처가 더 이상 나의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그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결단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 삶으로 살아내는 구체적인 용서의 여정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맞습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의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는 더 깊고 아프기 마련입니다. 부부 관계가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용서가 필요한 관계가 부부입니다. 가장 사랑하기에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관계가 바로 부부입니다. 배우자의 무심한 말 한마디,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서운함, 반복되는 잘못된 습관들이 쌓여 마음의 담을 만들지는 않습니까? 이때 필요한 용서의 첫 단계는 나의 상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그 말 때문에 정말 마음이 아팠어"라고 솔직하게, 그러나 비난이 아닌 ‘나’를 주어로 이야기하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또한, ‘완벽한 배우자’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와 다른 환경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의 연약함을 품어주기로 결단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용서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잠들기 전, 오늘 하루 서운했던 일을 마음에 품고 눕지 마십시오. "여보, 오늘 이런 점은 속상했지만, 그래도 사랑해. 우리 내일은 더 잘해보자." 이 작은 용서의 실천이 부부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관계 또한 용서가 절실합니다. 가족이기에, 가장 친한 친구이기에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부모님의 편애, 형제간의 갈등, 믿었던 친구의 배신 같은 상처는 평생의 흉터로 남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심리학자들은 ‘기억의 재해석’을 권합니다. 그 사건을 ‘나를 파괴한 상처’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때문에 내가 더 강해질 수 있었던 계기’ 또는 ‘그 사람의 연약함을 알게 된 경험’으로 그 의미를 다시 써보는 것입니다. 집이 가난해서 내 인생이 어그러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해서 자립심이 강해졌다고요.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높고 낮고, 크고 작고, 많고 적은 모든 것들이 어울려 우리의 인생이 빛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모든 관계를 예전처럼 회복해야 한다거나, 모든 관계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세요. 어떤 경우에는 관계의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지혜로운 용서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마음으로 용서하기로 결단하되, 나를 지키기 위해 건강한 거리를 두는 것이죠. 이것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미움으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마음으로도 헤어질 수 있다는 거죠.
직장과 사회생활에서도 용서가 필요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죠?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축복하는 습관을 갖자고요. ‘네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당신이 정말 잘 되었으면 해.’ 성경은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이게 용서의 시작입니다. 나를 부당하게 평가하는 상사, 내 공을 가로채는 동료, 나를 음해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말도 밉게 하는 사람들 많죠. 이때 필요한 지혜는 그 사람의 ‘역할’과 ‘인간 자체’를 분리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의 잘못된 ‘행동’은 밉지만,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지는 않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위해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 상사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저 동료의 마음에도 평안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그 사람의 행동 이면에 있는 아픔이나 결핍, 불안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긍휼의 마음이 싹틀 때, 우리는 미움의 자리에서 벗어나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용서의 여정은 결코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힘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에 미움 대신 주님의 사랑을, 분노 대신 주님의 긍휼을 채워주옵소서."라고 우리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고백하며 나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용서할 힘과 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십자가, 용서로 활짝 열린 하나님의 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계의 어려움 속에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 쓴 뿌리가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병들게 하고 있습니까?
이제 그만 그 미움의 감옥에서 걸어 나오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 같이, 너도 용서하라." 이것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를 참된 자유와 평화로 이끄는 축복의 초대장입니다.
상대방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평안을 누릴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놓으신 그 위대한 용서의 길을 따라, 우리도 첫걸음을 내딛기를 결단합시다. 나의 삶을 묶고 있던 미움의 사슬을 끊고, 용서라는 우리 믿음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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