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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요한일서묵상일기 59 - 믿음이란,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3:23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성실하게 삶의 자리를 지키고 가꾸신 우리 공동체 가족들을 축복하며 박수를 보냅니다. 좋은 생각과 마음을 타인이나 환경에 맡기지 않고 내 안에 기쁨과 감사로 자족하며 빛을 자가발전하는 수고를 주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또한 그것이 가장 충성된 자의 자세이고 사역임을 아는 여러분의 지혜가 하나님의 권세와 축복의 통로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오늘 하루도 끝까지 잘 마무리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쉼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묵상의 마지막 대목이 '하나님의 계명'이었던 것을 기억하시죠? 오늘 시작이 '하나님의 계명'인 것을 보면 어제와 이어진 말씀임과 동시에 다시금 강조하려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죠. 어쩌면 오늘 본문,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23~24절은 지금까지 요한일서 3장에서 말한 말씀의 총정리이자 요약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묵상이 될 것 같은데요. 이해해 주시고 지난 말씀들을 한마디로 정리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이 이것이다'라고 콕 집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2가지로 요약되어 있는데요.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시죠? 요 며칠, 저는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탕자의 비유를 예로 들어 설명드렸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이게 중요해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보통 '알량한' 양심의 가책을 받죠. 그것은 '어떻게 아버지를 볼 수 있나?' 이것입니다. 매몰차게 아버지를 떠났고, 그동안 아버지를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게다가 이제 모든 것을 다 잃고 또다시 아버지께 손을 벌리는 것이 자식으로서 살 짓인가?라는 외침이죠. 소위 이 정도 양심은 가져야 인간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죠? 그러나 그것이 양심이든, 깨우침이든, 자책이든, 스스로에게는 멋져 보일지 몰라도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는 전혀 모르는, 그야말로 이기적인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아직 배부른 소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는 거죠. 

 

믿음이란,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내가 판단하지 않는 거죠. 우리도 가끔 스스로 판단해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가능할까?' '설마 이런 기도도 들어주실까?' '이거 양심 없는 기도 아닌가?' 그래서 스스로 기도의 정도를 재고, 할 수 있는 기도를 제한하여 하나님 앞에 나올 때가 있죠. 이미 우리는 믿음과는 상관없는,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색한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한계를 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분이 나를 용서하실까? 그분이 나를 받아 주실까? 그분이 나에게 은혜 베푸실까? 그런 한계를 정하면 우리는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기도에는 역사하는 힘이 없어요. 

 

사도 요한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표현했다는 의미는 우리가 이미 '담대함'이라는 주제의 묵상을 통해 나눈 바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우리가 담대히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의 표현 또한, 믿는다면 안 된다는 한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더 나아가 알량한 자존심도 부리지 마시고 뻔뻔하게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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