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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요한일서묵상일기 61 - 기뻐하는 자에게 기쁠 일들이 더 많아집니다.

요한일서 3:24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는 압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무더위, 높은 습도, 끈적한 기분, 한 여름의 날씨에도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지키는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특별히 급격한 온도차로 인해 몸이 상하지 않기를 바라고, 높아지는 불쾌지수를 지혜롭게 잘 관리하시길 빌어요. 그것이 우리의 영성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했던 사도 요한은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유익에 대해 오늘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나보다 하나님이 더 크신 분임을 선포했죠. 그것이 믿음이라고요. 너무도 간단한 말이지만 사실 우리는 그 부분에서 가장 실수를 많이 합니다. 아니, 가장 잘 몰라요.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거죠.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믿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크신 분이라고 말이죠. 나보다 더 지혜로우시고, 나보다 더 정확하시고 옳으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죠.

 

이사야서 55:9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더 우선이죠. 내 생각이 더 낫다고 여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NO! 하시면 우리의 감정은 어떤가요? 화를 내죠.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을 막으시고 다른 길을 주셔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내가 옳다고 여기니까 그런 거죠. 내가 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니까요. 내 현실을 주님이 잘 모르신다고 여기며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나님 앞에 대들죠. 이게 우리 믿음의 현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어떻게 기쁨과 감사를 간직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 어찌 기뻐하냐고 말이죠. 맞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현실에서 어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말에는 전제가 잘못되어 있어요. 자신의 기쁨을 현실에서 찾는다는 결정을 미리 한 질문이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인은 현실에서 기쁨을 찾지 않습니다. 오로지 믿음에서 기쁨을 찾죠. 하나님이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눈동자같이 지키신다는 그 믿음, 나의 생각보다 더 깊이 생각하시고, 나의 계획에 앞서 예비하시며, 내가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용서를 품고 계심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런 경험 있으신가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고 내 속마음을 몰라줄 때 속상하죠. 그런데 어떤 중요한 사람이 나를 알아줘요. 내가 믿고 의지하는 분이 나를 믿어줍니다. 그때 용기가 생기고 많은 오해 가운데도 실족하지 않고 묵묵히 헤쳐나갈 수 있었던 그런 경험말이죠. 어떤 사람이 그랬다죠?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요. 이게 기쁨 아닌가요? 하물며 지금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믿어주시고 응원해 주신다면 어떨까요? 그보다 더 기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더 용기가 날 방법이 있나요? 그래서 믿음과 기쁨은 하나인 것이고, 그것이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믿음과 기쁨을 갖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이 보이죠. 사도 요한은 그것을 성령께서 알게 하신다고 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과 기쁨, 감사로 살면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거죠. 오해는 하지 마세요. 성령께서는 우리 가운데 늘 임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그러나 그분의 영이 존재한다는 것과 일하신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소위 술집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믿음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술집이나 공간적으로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교회를 지었다고 그것이 건물이 아니라 무슨 신성한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는 이유는 그곳에 믿음이 있고, 기쁨과 감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찬양이 있고, 반응이 있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비유 말씀 가운데 달란트의 비유라고 제목이 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말씀이죠.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던 비유 말씀이죠. 이 비유에는 수많은 의미들이 있습니다. 그 의미들이 주는 메시지가 다 있죠. 그런데 저는 그리 중요시되지 않는 한 부분에서 묘한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이 대목입니다. 

 

마태복음서 25:28~29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부분이 불편했던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대목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 빼앗아 가진 자에게 더 주라는 말씀이 어색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런 전제를 붙이셨어요. 

 

"또 하늘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하늘나라의 원리가 작동하는 비유라는 뜻이죠. 그 원리 가운데 중요한 것이 오늘 본문과 연결됩니다. 바로 믿는 자에게 더 믿음의 능력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찬양하는 자리에 더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고요. 기뻐하는 자들에게 더 기쁜 일이 벌어진다는 거죠. 이게 하늘나라의 사정이라는 거예요.

 

그런 말씀드린 적이 있죠? 잘못될 것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내 눈앞에는 잘못될 상황들이 더 많이 보인다고요. 부정적인 눈에는 부정적인 것이 더 많이 보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이 확신으로 바뀌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믿는 자 안에서 성령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자에게 기쁠 일들이 더 많아져요. 기뻐하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자들 눈에는 감사한 일들만 보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곳에서 활성화되기 때문이에요. 

 

오늘도 기뻐하는 공동체 가족들 위에 일하시는 성령님께서 더 기뻐할 일들을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하심을 느끼고 경험케 되는 은혜가 일어날 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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