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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요한일서묵상일기 57 - 진짜 믿으시나요?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의 오늘을 만드는 것은 남도 아니고 상황도 아닌 바로 나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생각과 마음, 좋은 기분과 기쁨을 나에게 줄 수 있는 것도 나뿐이죠. 그래서 오늘 이 아침에 우리는 이렇게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오늘의 기분은 내가 지킨다고요. 누가 뭐라고 해도 오늘 나의 감정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내가 다스린다고요. 그렇게 아름답게 만든 나의 시간 되길 빕니다.

 

어제 우리는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아니 나의 죄보다 하나님의 용서가 더 크시고 강하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떤 변화,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 묵상을 시작했죠. 어제 그 첫 번째로 담대함을 갖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변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변화이기도 하지만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죠.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 그것도 '무엇이든지'라면 그것보다 더 큰 능력이 어디 있을까요? 지금껏 묵상한 대로 풀어서 말하면, 우리가 나의 죄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더 크고, 나의 알량한 양심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훨씬 강하고 넓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용기가 생기고 또 그 아버지께서 날 위해 무엇이든지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죠. 여기서 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한 것은 어떤 남성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사랑하고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임을 알아서 언제나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 그 사랑의 상징으로 차용된 표현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감사하고 기쁜 약속의 말씀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우리가 숙고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담대함을 가지는 것,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또한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분을 나의 창조주로, 나의 아버지로,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이 좀 의아하신가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외치고 있죠. 그래서 이 말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말처럼 쉽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함정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한번 보세요. 아버지, 혹은 엄마에게 어떻게 합니까? 실로 '무조건' 믿죠.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 맡깁니다. 그들에게는 아빠, 엄마가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는 만능의 존재로 여기죠. 그래서 그들의 요구에는 한계가 없어요. 가끔 별도 따달라고 말하기도 하죠.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하나님께 예의가 바르죠. 이 예의라 함은 마치 이제 커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그들에게 말해서는 안 될, 요구해서는 안 될 것들을 구분하며 적당히 예우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제 표현이 미숙하지만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우리는 어느덧 아주 점잖고 예의 바른 자녀로 살아가죠. 거기에는 옛날 어린 시절의 황당한 요구는 없습니다. 지금은 알기 때문이죠. 아버지나 어머니가 신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그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은 못 들어주실 거야' 그래서 기도 못하는 것이 있지는 않나요? '이런 것은 미신 아닌가?' '설마 이것도 가능할까?' 이런 전제들이 나에게 있지는 않나요? 그래서 이제 기도도 가려서 하지 않습니까? 추리고 추려서 '요 정도는 가능하실지도 몰라'라며 어렵사리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이유야 어떻든 우리의 기도에는 늘 한계가 있고, 우리의 요구에는 늘 나의 자존심이 존재하죠. 때론 하나님을 무안하게 해 드리지 않겠다는 알 수 없는 예의가 있고, 때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하나님보다 더 우선하는 태도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신가요?

 

우리가 잘 아는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죠.

 

마가복음서 9:2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개역성경에는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죠. 이 번역본이 더 익숙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오늘 본문 구하는 것은 모두 받을 수 있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하죠. 그런데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면 우리는 조금 다른 해석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혹시 배경이 생각나시나요? 이 말씀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장면에 등장합니다. 그때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아이를 살려달라고 요청을 하죠. 그런데 그 요청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가복음서 9:22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도 던지고, 물속에도 던졌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말에 예수님이 반응하시고 위의 말씀을 하신 것이죠. 그러니까 위 말씀의 핵심은 여기에 있어요. 우리가 모든 일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데 있고, 할 수 있다 없다는 내가 판단하지 않는 데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NO'라는 응답조차도 우리는 자신의 판단에 입각해서 받아들이죠. 돼야 하는 것을 안 되게 하신다고 말이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가장 적절하고 옳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늘 나의 기준, 나의 판단으로 해석하려고 하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반증인 겁니다.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 그것을 믿으시나요? 하나님의 판단은 늘 옳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늘 맞으며, 하나님의 계획은 늘 좋은 길임을 믿으시나요? 비록 나의 생각과 달라도, 비록 나의 뜻과 달라도 말입니다. 그분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고, 그분의 사랑은 무궁하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고, 내가 배운 바로는 가능성이 없어도 말이죠. 그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삶에 드러나고 넘치게 하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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