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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요한일서묵상일기 56 - 조금은 뻔뻔하게, 조금은 담대하게 주님께 돌아오세요.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7월을 시작하는 어제는 뜨거운 하루였습니다. 오늘은 어떨까요? 오늘은 비소식이 있네요.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이, 우리의 인생은 균형을 이루며 진보해 가죠. 더운 날이 있으면 시원한 날도 있고, 맑은 날이 있으면 비 오는 날도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슬픔과 기쁨은 한 짝을 이루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쁜 날만 있지 않습니다. 잘 나갈 때만 있지 않죠.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절로 기쁨이 머물지 않는 날이 있기 때문이죠. 기쁨을 쟁취하고 지키는 것이 능력인 이유는, 비 오는 날, 더위를 식혀주는 비를 떠올리고, 아픈 날, 다시금 건강을 챙길 기회로 삼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누구나에게 적용되지만 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죠. 오늘이 어떤 날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기뻐하기로 했으니까요. 그것이 오늘을 사는 여러분의 능력입니다.

 

가책! 또 어제의 단어가 나왔습니다. 어제의 말씀과 이어진다는 의미죠. 이번에는 가책을 받지 않는다는 가정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어제의 묵상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죠. 그 속에 죄에 물든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마음이 있죠. 이것을 우리는 죄책감이라고 했죠? 그런데 죄책감은 양심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양심은 죄책감에서 회개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 죄책감에 대한 부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고 우리는 묵상했죠. 그것을 저는 알량한 양심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괜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모양새죠. 그런 사람 있죠? 자신을 나쁘다고 말하고, 괴롭다고 잠수 타고, 심지어 스스로 자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것이 알량한 양심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모습이죠. 진짜 양심은 자신이 나쁘다고 고백하고 괴로워하는 만큼, 그래서 자신을 변화시킬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알량한 양심, 그것은 소용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것, 그것은 회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니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죄책감에 괴로워할 시간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시면 됩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죄가 있더라도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요. 그것을 믿는 것이 회개죠. 

 

이와 같은 말씀이 어제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죠.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나의 죄보다 하나님의 용서가 더 크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 어떤 일 중 첫 번째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갖는 것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성경에는 이 '담대하게'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지만 오늘 본문과 가장 연관성이 있는 본문은 아마도 히브리서의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지성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했죠. 오직 정해진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죄 있는 인간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 지성소 앞에는 휘장이 있었어요. 그 휘장을 지날 수 있는 것은 제사장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그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면서 두 쪽이 났습니다. 이는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성소로 우리가 담대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죠. 그때 쓰는 단어가 바로 이 '담대함'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의미로 이 단어를 쓴 거죠.

 

그런데 저는 이 단어를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싶어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담대하게'라는 말이 그리 실감 나지 않기 때문이죠. 저는 이 단어를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바로 '뻔뻔함'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알량한 양심은 또 있습니다. 마치 집을 나간 둘째 아들처럼 모든 것을 탕진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음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내가 무슨 낯짝으로 아버지께 갈 수 있으랴. 이건 양심도 없는 거지."

 

어쩌면 이런 모습이 마치 멋진 사람처럼, 양심 있는 지성처럼 여기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사람 관계에서나 통하는 일이죠.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분의 용서가 얼마나 넓은지 안다면 우리는 그런 양심 따위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아니 쓸데없는 객기임을 알아야 하죠.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그럽니다. 필요할 때마다 교회를 찾고, 자기가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구하는 것이 무슨 교인이냐고 말이죠. 궁할 때만 기도 요청을 하고 잘 나갈 때는 코빼기도 안 보는 건 양심이 없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건 사회생활에서나 그렇지 교회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양심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뭐 양심이 대단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뭐 놀라운 의리가 있어서 은혜를 누리나요?

 

교회는 자기 필요할 때 기도 요청하라고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자기 궁할 때 도움을 청하라고 있는 곳입니다. 그렇게 뻔뻔하게 주님 앞에 언제든 나오는 것을 기다려 주고, 응원해 주는 곳이 교회예요. 주님 앞에 나올 때는 뻔뻔해야 합니다. 많은 죄를 지어도 나올 수 있는 뻔뻔함, 수없이 자기만 생각하며 이웃을 버려도 주님의 때, 주님이 필요할 때 뻔뻔하게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것이 은혜예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나님의 용서를 재단하고, 그분의 넓은 품을 축소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나 같은 것을?" 아니요. 나 같아서 하나님은 용서의 문을 열어두셨고요. 나 같아도 주님의 사랑에서 비껴갈 수 없기 때문이니까요. 

 

하나님을 멀리 떠났나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돌아올 때가 되었으면 어떤 가책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으니 조금은 뻔뻔하게, 조금은 담대하게 주님께 돌아오세요. 다시 떠나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또 돌아올 그때를 위해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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