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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요한일서묵상일기 58 -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그것이 의로움입니다.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이 아침부터 후텁지근합니다. 나날이 점점 더워지는 것 같죠? 우리는 옛 기억들을 자주 잊습니다. 마치 매년 올해가 인생에서 가장 더운 해처럼 느껴질 때가 있죠. 지나간 기억보다 지금의 현실이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지독했던 오늘의 현실도 지나고 나면 자연스레 잊힌다는 뜻이겠죠? 우리에게는 떠나지 않는 과거의 기억도, 미래의 두려움도 있지만 오늘 나에게 펼쳐질 하루는 과거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은혜의 기회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지나온 과거는 새롭게 기억되고, 다가올 미래 또한 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이 주신 기회이고 선물입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내일을 만드는 오늘을 사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같은 본문으로 세 번째 묵상입니다. 우리는 가책을 묵상했고, 담대함을 배웠으며, 구하는 것을 얻는 비결을 깨달았습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에 대한 작은 분석을 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가책을 받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 능력들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죠. 그러니까 담대함을 얻게 되고 구하는 것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설명하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뭘까요? 본문으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책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핵심은 '가책을 받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죠. 이미 이전 본문에도 가책에 관해 언급했었죠. 그래서 '가책을 받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다뤄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함께 묵상했던 '가책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을 다시금 언급하며 묵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가책을 죄책감으로 해석했습니다. 내 안에 늘 묶여있는 죄의식으로 읽었죠. 더 나아가 알량한 양심으로 표현했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오지 못하는 모습이 있죠. 때론 미안해서, 때론 너무 뻔뻔해서 감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죠.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오는데 무슨 해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슨 설명이 필요해요. 돌아올 때 아버지는 죄를 따지지도, 잘못을 책망하지도 않으시고 그저 안아주셨습니다. 그게 전부죠. 우리 안에 있는 알량한 죄책감을 버리고 주님께 뻔뻔하게 돌아오라는 것이 우리가 묵상한 가책에 대한 말씀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보편적인 해석일지도 모르죠. 그 해석은 '가책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가 거리낌이 없을 만큼 온전히 살라는 의미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 죄도 짓지 않고 살면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죄 없이, 온전하게, 오로지 의인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요. 

 

저는 사도 요한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우리가 죄 없이 살고, 흠없이 살고, 의인으로 살아야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고, 그분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흠이 없고 완전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죠. 이미 사도 바울도,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 바 있죠. 더욱이 그렇게 의인 중심의 교리를 통해 교회가 편을 가르고 스스로 거룩한 척, 세상과 대립하는 구도로 인해 기독교는 더욱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게다가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문제로 아파하고, 그럼에도 주님 앞에 서지 못하고, 교회의 도움을 받지 못해 떠나는 현상들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죄인이어서 교회가 필요하고, 문제 많아서 십자가가 필요한 거죠. 그럼에도 교회는 깨끗해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합니다. 어떤 믿지 않는 자들은 교회가 문제 많은 사람들이 많다고 놀려댑니다. 그걸 교인들은 부끄러워해요. 왜 그럴까요? 사실 교회에 문제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이 맞는 말 아닐까요? 문제가 많아서 교회에 다니는 거 아닌가요?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우리가 교회에 머무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깨끗하면 왜 교회가 필요합니까? 믿지 않는 사람만큼 믿는 사람들도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의인이어서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죄가 없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아닙니다. 죄도 있고 문제도 많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나의 죄가 있지만, 그럼에도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 때문에 우리는 은혜를 받는 거죠. 그래서 교회에서는 문제없고, 깨끗하고, 거룩해서 박수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 많아서, 아직 덜 돼서, 해결할 일들이 많아서 환영하고, 응원하며, 포용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 교회는 그런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나눔이 우리 공동체에게 정말 잘 전달되었으면 해요.

 

의로움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죄를 이기고, 무슨 거룩의 높은 경지에 올라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어떤 죄가 있더라도, 내가 어떤 잘못이 있더라도, 내가 어떤 문제의 중심에 있을지라도 주님 앞에 설 수만 있다면 그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가산을 탕진하며, 그 어떤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을지라도 아버지께 돌아오는 그 시간, 그 자리, 그 마음, 그 행동이 의로움입니다. 제 아무리 변명하고, 부끄러움을 가지고 양심을 찾아도 주님 앞에 서지 못하는 것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의롭지 못한 행동이에요. 상태가 좋든지 나쁘든지, 상황이 되든지 안 되든지, 기회가 있든지 없든지, 어느 때든지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다면, 그 앞에 엎드릴 용기가 있다면, 반복되는 죄에도 지금 고백하고 회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의로움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고,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죠. 그러니 꼭 좋은 사람 되려고 하지 마세요. 언제나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세요.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아플 때도, 건강할 때도, 기분이 상하고 안 좋은 감정에 휩싸일 때일수록 더욱 주님 앞에 서는 사람이 되세요.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기보다 주님 앞에 서지 못해서 죄인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양심을 지켜도 돌아와야 할 그때,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아들은 그의 품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게 불의고 죄입니다. 언제나 주님께 돌아오는 길은 가까운 사람이 되세요. 언제나 그 돌아오는 시간이 길지 않은 사람, 속히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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