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고린도후서묵상일기

고린도후서묵상일기 92 - '내가 끝이라고 여기는 그때, 하나님은 시작을 하셨다.'

고린도후서 13:1~3   나는 지금 세 번째로 여러분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모든 소송 사건은 두세 증인의 말을 근거로 하여 결정지어야 합니다." 내가 두 번째로 여러분을 방문하였을 때에, 전에 범죄한 사람들과 또 그 밖에 모든 사람에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지금 떨어져 있으면서도 다시 말하여 둡니다. 내가 이번에 다시 가면, 그러한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떨치시는 분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요즘도 여전히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더군요. 많은 이들이 코로나, 혹은 독감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빠른 치유와 회복을 기도합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이 있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성은 다르지 않은데 우리의 느낌은 많은 차이를 보이죠. 이제는 두려움보다는 자신감이 더 강한 것 같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두려움이란 질병은 어떤 문제를 과대포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죠. 또한 두려움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듭니다. 어쩌면 오늘 이 아침, 두려움으로 출발하는 이들이 있으실지 모르겠어요. 미지의 세계, 앞으로 다가올 미지의 시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며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편이시고, 그분의 돌보심은 여전히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시다고 말이죠. 두려움을 믿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주님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는 그분의 능력이 나의 시간을 채울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방문 계획을 밝히고 있죠. 세 번째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시간별 관계를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에서 소아시아, 지금의 튀르키예 전도를 시작했다가 뜻하지 않게 마케도니아지방까지 가게 되죠. 마케도니아는 지금의 그리스로,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주의 빌립보, 데살로니가 등에 교회를 세우죠. 참고로 그리스 북부에 있는 마케도니아주는 동, 중, 서부의 3개 주로 나뉘어 있는 그리스에 속한 지역입니다. 그 위에 있는 북마케도니아는 다른 독립 국가죠. 그러다가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고린도까지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긴 시간을 머물며 교회를 세운 후, 다시 배를 타고 튀르키예로 넘어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죠.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편지를 써 보냈는데 이 편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5:9에 이미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는 구절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죠.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린도 교회 지도자들이 편지를 들고 에베소에 바울을 찾아오죠. 이에 대한 답변식의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그 편지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걷잡을 수 없었던 모양이에요. 이 때문에 바울은 급하게 고린도를 찾습니다. 이게 두 번째 방문이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 방문 때 바울은 굴욕을 당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을 냉대하고 쫓아낸 것이죠. 이에 슬픔과 분노에 찬 바울이 작정하고 또다시 편지를 쓰는데, 이 편지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눈물의 편지라고 명명된 이 편지에는 바울의 격정적인 마음과 직설적 표현이 있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죠. 

 

이미 이전에 묵상한 대로 바울은 어쩌면 그 눈물의 편지로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가 끝날 수도 있겠다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에는 어르고 달래는 편이었던 바울이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책망을 토해냈기 때문이죠. 이전에는 어리고 미숙한 고린도 교회여서 조심하고 자제했던 바울이기에 그 편지는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을 알았을 거예요. 어쩌면 도 아니면 모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오히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라는 생각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고 저는 추측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하고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지죠. 일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마음을 움직인 겁니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일부가 회개하며 바울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죠. 그 때문에 이 고린도후서가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금 고린도를 방문할 계획을 밝히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번에 가면 그런 사람들, 그러니까 범죄하고 비방하고 싸우고 나쁜 말들을 전하는 이들이겠죠? 그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는 바울이 지난번 방문 때 가만히 있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조심했을 것이고, 직언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어쩜 교회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극도의 말을 아낀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우리에게는 늘 그런 두려움이 있죠. 옳은 일이지만 두려워서 옳다고 말하지 못하고, 바른길이지만 잘못될까 봐 두려워서 걷지 못하는 일들이 있죠. 바울과 같은 지도자가 그랬을까? 싶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바울이라고 우리와 다를까요? 모두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성경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시작으로 만드셨다는 것을요. 하나님의 일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을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걱정과 두려움을 거두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만 걸으면 됩니다. 우리가 선한 길을 걸으면 그 길은 선하신 하나님이 지키시죠.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선한 것이 악한 것을 이길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느냐가 아니에요. 우리가 바라고 기도할 것은, 내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아무 두려움 없이, 믿고 걸을 수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 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걱정할만큼 연약하지 않으셔요. 그분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일하십니다. 우리의 걱정을 넘어서, 우리의 두려움을 뛰어넘어 일하시죠. 그분을 믿는다면 그분의 능력은 우리 가운데서 일하실 거예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