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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후서묵상일기

고린도후서묵상일기 82 - 숨어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

고린도후서11:5~7   나는 저 거물급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말에는 능하지 못할는지 모르지만, 지식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일에서 여러 가지로 여러분에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높이기 위하여 나 자신을 낮추었고, 또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죄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 공기가 찹니다. 지금 기온이 영하 12도입니다. 출근길 단단히 준비하시고 나가셔야겠어요. 어제는 눈도 와서 길도 미끄러울 것 같아요. 모두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강추위에 건강 주의하시고 한파로 인해 고생하는 이웃들 돌보아 주시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전파자가 된 이후, 끊임없이 비교를 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경력이 있었던 터라 그에 대한 의구심은 언제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을지도 모르죠.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같이 한 제자 그룹에 속하지도 않은 자였기에 그의 권위는 늘 의심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복음의 사도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것이 한편으로 불편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죠? 그런 대립이 고린도 교회에서 첨예했습니다.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이와 관련된 해명을 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할 만큼 그에 대한 오해와 비판은 그의 사역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죠.

 

그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말에는 능하지 못하나 지식은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죠. 그가 언변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를 통해 복음을 접한 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면 그의 언변이 나쁘다고 보기도 힘들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언변이 나빴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그 당시 바울을 향한 공격 중의 하나가 언변 부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바울의 비판자들은 탁월한 언변을 자랑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언변을 중시하는 이들이 언변에만 국한하겠습니까? 언변이라는 것이 보통 겉으로 드러난 말을 의미하잖아요. 삶을 통한 교제에서 나오는 메시지와는 다른 것이죠. 그렇게 달달한 말솜씨를 우선시한다면 어디 그것으로만 그치겠습니까? 그들은 언변 부족을 지식 부족으로까지 몰아갔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바울의 가르침은 틀렸다고 했는지도 모르죠. 뿐만이겠습니까? 그의 외모를 가지고도 평가를 했었죠. 학자들에 의하면 그의 외모는 볼품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이러니 그들은 추천서를 따지고, 출신과 배경을 중요시하는 거죠.

 

저는 언변이 많이 부족합니다. 설득력도 부족하고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도 부족합니다. 적절한 단어와 출중한 표현력으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이들을 보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지나고 나서야 이렇게 말할걸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죠. 그럼에도 공동체 가족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이 있어요. 부족한 언변 뒤에 숨어있는 여러분들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기도를 읽어달라고요. 특별한 재능도 재주도 없지만 하나님의 통로가 되고픈 간절한 소망과 애달픈 노력이 있음을 말이죠.  여러분을 떠올리면 벅찬 마음과 고이는 눈물로 주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자리로 인도하고픈 마음 간절합니다. 그래서 때론 어설픈 말솜씨보다 가진 마음을 봐주시기를 바라고, 실수 많고 부족한 표현력보다 우리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생각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속성을 두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는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 이고, 다른 하나는 "숨어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고 말이죠. 우리의 생각과 감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 반면에 우리의 이성과 의지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나님도 계십니다.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깊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숨어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발현되죠. 배고파서 보채는 갓난아이에게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젖을 주는 엄마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배고픈 아이의 울음에도 젖을 물리지 않는 엄마의 아픔도 있습니다. 그 갓난아이가 장염에 걸렸다는 사실을 엄마는 알기 때문이죠. 그 숨어 있는 뜻의 아픔은 고스란히 엄마의 몫입니다. 그 눈물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죠. 

 

조금 더 성숙하려면 보이지 않는 언어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조금 더 나아지려면 숨겨져 있는 뜻을 읽을 줄 알아야 하죠. 숨어계신 하나님에게서 귀하고 아름다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우리의 몫이고, 그 좋은 상상력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서 우리에게 돌아올 거예요.

 

'숨어계시는 하나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셔도 그분은 여전히 나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내 뜻과 다른 하나님이셔도 그분은 여전히 내게 은혜 주시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셔서 그분을 신뢰하고 찬양합니다. 순종하고 경배합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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