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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골로새서묵상일기

골로새서묵상일기 47 -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골로새서 3:24~25   여러분은 주님께 유산을 상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섬기는 분은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행한 불의의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을 보고 차별을 하는 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부와 부모 자식, 그리고 이웃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에 얽힌 관계성에 대해 지금까지 언급했습니다. 개인적인 관계, 사회적인 관계를 아울러 설명을 했죠. 이제 남은 것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관계를 설명하죠. 바울은 우리가 주님께 유산을 받는 관계라고 설명합니다. 제가 어제 남편, 아내, 주인, 종, 이런 단어들에 집착하면 진영논리에 빠져 말씀을 읽는 눈이 좁아진다는 말씀을 드렸죠? 오늘 본문의 유산이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유산이란 물려받은 재산을 의미하는데요. 여기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죠. 하나는 물려받음이고 다른 하나는 재산이에요. 사람들이 주로 재산에 집중합니다. 좋은 것이니까요. 축복이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이지만 그 단어 안에도 두 가지 개념이 있죠. '주시는 분'과 '받는 은혜'가 있어요. 이 두 가지 개념에서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렇게 재산, 복, 잘됨에 집중하다 보면 그것을 누가, 왜, 어떻게 주시는 것인지를 잃어버리죠. 어쩌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은 주시는 분의 이유와 마음인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갖가지 은혜를 입습니다. 먹을 것도 얻고, 목마름을 채울 물로 받죠.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불평했던 이유는 그들의 눈에는 만나나 물만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평이 생길 수밖에 없는 거죠. 진짜 믿음은 눈에 보이는 너머에 있는 분을 보는 것입니다. 마치 검정 봉투에 먹을 것 너머에 담긴 아빠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말이죠.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님의 유산을 받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주님과 나 사이를 정의하는데요.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받고, 그분의 사명을 지며 살아갑니다.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존재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는 그분의 노예가 아닙니다. 로봇이나 종이 아니고요.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는 피붙이죠.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주님과 나의 관계에 너무도 중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명을 마치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매개체로 여깁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관계가 끊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죠. 조금만 실수하면 쫓겨나는 못된 직장 상사처럼 주님을 여기기도 합니다. 말이 과하지만 사실 우리 몸속에는 이와 같은 두려움과 의식이 존재해요. 이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여기기보다 무엇인가 지배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은 조건이 아니라 삶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이루어서 주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아서 사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니까 순종하듯이 말이죠.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정립되어야 해요. 그분은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그저 자녀이기에 만족하시는 거예요.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길을 인도하시고, 믿는 자녀이기에 요구도 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늘 종교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과 나의 관계는 어떤 목적으로 계약된 관계가 아닙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사이도 아니에요. 주님과 나는 창조주와 피조물, 부모와 자녀, 사랑으로 하나 된 사이입니다. 무능하다고 쫓겨나고, 죄 지었다고 벌 받는 존재가 아니에요. 연약해도 자식이고, 잘 못해도 자식입니다. 학교 가는 아이에게 조심히 다녀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이가 학교 가는 길에 장난치다 넘어져 다쳤어요. 그러면 부모가 말 안 들었다고 자식을 버리나요? 보듬어 안고 치료하고 덮어주죠. 그러고도 또 학교 가려 나서는 아이에게 조심히 다녀오라고 말하죠. 주님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지 심판이 아니에요. 그것은 은혜로운 인도하심이지 처벌의 잣대가 아니에요. 그 관계를 왜곡하면 우리의 신앙은 비틀립니다.

 

오늘 25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행한 불의의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을 보고 차별을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 구절만 떼어 읽으면 이것은 심판의 메시지죠. 그런데 이전의 구절과 연결되어 읽으면 어떨까요? '너와 나 사이의 관계는 조건부 계약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다'라는 전제에서 이 글을 읽는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관계를 믿지 않는 사람이 되겠죠. 주님이 아버지보다는 고용주로, 그분의 말씀이 은혜로운 이끄심이라기보다는 명령과 강압적인 지시로 여기는 사람이 불의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부정적이고 빗나간 시선으로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설정한 사람은 그만큼의 대가가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죠. 죄를 묵상하는 사람은 그 앞에 죄만 보일 거예요. 모든 일에 잘못될 것을 예상하는 사람은 잘못된 일만 앞에 놓일 겁니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찬 사람은 수많은 감사한 일들 속에서도 걱정과 염려만이 가장 강하게 느껴질 것이고, 낙심과 좌절로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기회조차 낙심 거리로 보일 것입니다. 이게 불의의 대가일지도 몰라요. 이는 어떤 누구도 비껴갈 수가 없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제가 아침마다 부르는 찬양입니다. 수없이 낙심하고, 수없이 좌절하며, 수없이 실수해도 오늘 이 아침 새로운 아침을 주시며,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시고, 늘 새롭게 나를 바라봐 주시는 내 아버지의 그 인자하심, 그 자비하심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오늘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그분의 눈은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시고 살피시기 위해서 오늘도 바라보십니다. 그분의 손길은 나를 체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길을 인도하시기 위해서고요. 그분의 말씀은 나를 강요하거나 지시하기 위해서가 아닌 나를 깨우고 생각을 넓히시기 위해서임을 기억하는 오늘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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