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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골로새서묵상일기

골로새서묵상일기 42 -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골로새서 3:17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으신가요? 혹은 직장 동료, 친구, 직원 등을 고른다면 고려해야 할 사항은 어떤 것일까요?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연구하는 기관에 따르면 배우자 선택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부동의 1위가 있다는데요. 그것은 '성격'이랍니다. 누군가를 만나든지 그 사람의 성격이 관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다는 반증이죠. 이를 이어 중요한 선택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서 많이 변했다고 하는데요. 어느 때는 가정환경이, 또 어느 때는 학벌이 중요했던 시대가 있었데요. 그런데 현재는 '경제력'이라고 하네요. 아마도 이는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골로새서 3장 전반부에서 말한 내용의 결론을 짓는 구절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아요. 그 결론은 2가지로 압축되는 데요. 그것을 저는 그리스도인의 성격과 능력으로 구분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까요? 지금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기도 하고, 교회에 다니거나 이력서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으로(최근에 이력서는 종교란이 없어졌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기도 하죠. 그런데 초대교회는 그렇게 직접적인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이와 같이 대놓고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할 수 없는 곳들이 많아요.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죠. 이를 보면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리스도인임내 하면서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모습을 보일 때 이웃들은 더 실망을 합니다. 그에게서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성격을 확인하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로 보면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성격 형성으로 좌우되는 것 같아요.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라며 성격이 형성되듯 말이죠. 사도바울은 그 성격 형성의 중요한 키포인트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말씀을 나의 삶에 적용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대부분 말씀을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도 알고 그 의미도 알죠. 그러나 내 삶에 적용하지 못하죠. 그 이유는 말씀을 너무 고차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운동의 예를 든다면 이런 거예요. 근력운동을 하려고 치면 사람들은 보디빌더를 먼저 떠올리죠. 울끈불끈 한 근육들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먹을 것도 못 먹고, 매일 몇 시간씩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고, 찢어지는 근육의 아픔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죠. 그리고는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합니다. 나는 그런 운동 못한다고 말이죠. 그런데 운동한다고 다 보디빌더가 되지는 않습니다. 굳이 식단을 조절하며 단백질만 먹을 필요도 없어요. 나에게 맞는 운동을 하면 됩니다. 스트레칭부터 간단한 계단 오르기, 집 주위를 걷기 등을 하면 됩니다. 무리해서 산을 오를 필요도 없어요. 그저 나에게 맞는 작은 것부터 하면 되죠. 말씀이 그래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벌써 겁부터 냅니다. 나는 그런 사랑 못한다고요. 성경에 나오는 사랑이 대단해 보이죠. 나의 것을 다 주고,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을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죠. 그러다 보니 말씀이 머리에만 있고 삶에는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오늘 누군가의 작은 실수를 덮어주는 것, 가령 그 일 때문에 내 기분이 나빠졌고, 화를 내고 싶은 감정이 들었던 그때, 그의 실수를 안아주는 것만큼 큰 십자가는 없어요. 그 작은 것들이 나의 성격을 형성합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무슨 일이든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을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가지고 일하라는 말로 해석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말이나 행동에 주의하라는 의미로 말이죠. 이 말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은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이 말이 너무 무겁습니다. 매분 매초 우리는 그리스도를 잊지 않아야 하고, 그분의 생각과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하니까요. 그것이 어디 쉽습니까? 말이 쉽지 내가 하기 쉬운 가요? 툭하면 말실수하고, 툭하면 자기 성질이 드러나는데 그러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자괴감에 빠지게 되죠. 이런 못난 자아로 어찌 주님의 제자가 될까? 하고 말이죠. 그러다 보니 이 말씀을 은혜로 듣지 않고 부담으로 듣는 겁니다. 나보고 좀 조심하며 살고, 어렵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죠. 그런데 저는 다른 생각을 해 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이 저에게는 다르게 들려요. 내가 이 땅에서 주님을 대신해 사는 사람이라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래서 말을 조심하고 행동거지를 주의하라는 말처럼 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들립니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너는 내 것이니 내가 책임진다는 말처럼 들려요.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내가 주님을 닮아 산다는 의미보다는, 내 형상을 닮은 내 자녀를 내가 보호하고 책임지겠다는 주님의 마음으로 저는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이런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그다음, 그리스도인의 능력 부분에 대한 말씀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감사의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 앞에는 하나님의 힘을 얻어서라고 말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이든, 어떤 모습이든, 때론 어떤 죄를 짓든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책임지시겠다는 의미의 하나님 자녀이기에 우리는 그 능력에 힘입어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좀 어려우신가요? 혹은 반감도 생기시나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분을 닮아간다는 것은 그분과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도 아니죠.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용서와 이해를 받으며, 은혜와 긍휼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실수할까 봐 두려워하지도 마세요. 넘어질까 봐 염려도 마세요. 죄에서 해방되지 못할까 봐 조바심 내지도 마세요. 우리 생각에 채울 것은 실수도, 염려도 죄도 아닙니다. 그것을 되돌리시고, 회복시키시며 새롭게 하실 주님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 하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이는 나에게 어떤 의무감이 주어지는 말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책임지시겠다는 증표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사세요. 넘어져도 일으키실 그분께 감사하며 사세요. 실수해도 용서하실 그분을 찬양하며 사세요. 그러니 자유롭게 뛰어노세요. 감사를 잃지 않는 자는 넘어져도 일어나고, 실수해도 회복이 됩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경제력이고 재산입니다. 그러니 염려, 걱정보다 감사하세요. 못하면 어쩌나? 보다 감사를 먼저 하세요. 잘못해도 돌이키실 그분께, 실수해도 새롭게 하실 그분을 믿으며, 감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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