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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골로새서묵상일기

골로새서묵상일기 38 - 거룩함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골 3:12~13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지금껏 땅의 것에 대해 설명하던 바울은 이제 위의 것에 집중합니다. 그것은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이라고 알려줍니다. 또한 이 같은 마음은 이런 태도를 갖게 하는데요. 곧,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는 모습을 그리고 있죠.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는,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어떠한 경우, 즉 추구하든 혹은 버리려고 노력하든 어느 경우든지 머리의 묵상에서 버리고,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에 대해 마음과 생각을 채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태도는 이렇게 바뀔 거예요.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내뱉는 모습에서, '이해와 용납, 용서'의 모습으로 말이죠.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에요. 끊임없이 안 좋은 생각, 차별의 마음, 화나고 격분하게 하는 생각과 이를 가는 상상들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담지 않는 노력이고요. 또한 끊임없이 좋게 보려고 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하죠.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며 찬송과 기도로 나아가는 것은 무슨 종교적 행위가 아닙니다. 바로 내 마음을 성령의 열매로 채우는 일이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말이죠.

 

분명 오늘 본문의 핵심은 위에 언급한 내용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다 아는 단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행동하지 못하는 이들은 없을 거예요. 또한 불평을 버리고 용납과 용서를 하라는 권면은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로 들어왔을 겁니다. 이를 어찌 모를 수 있겠어요? 다만 잘 되지 않아서 문제일 뿐이죠. 그래서 그런지 저는 오늘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택하심]이라는 단어와 [옷]이라는 단어였어요. 

 

하나님의 [택하심]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이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우리의 선택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죠. 선택이 되었다는 것은 뭔가 큰 선물처럼 여깁니다. 가령, 내가 선택되었다면 어디 합격을 하거나 당첨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선택은 어떤 선물이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우리의 인식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은 조금 다릅니다. 그분의 선택은 선택 자체에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선물인 셈이죠. 그래서 그분에게 선택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고난이 될 경우도 있습니다. 선택받았기에 광야를 걷게 된다거나 선택받아서 선지자로서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죠. 이는 마치 제가 곧잘 예를 드는 경우와도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학교에서 환경미화라는 것이 있었어요. 이름도 촌스럽죠? 주로 교실 내 벽면을 꾸미는 일이었습니다. 글씨도 오려 붙이고 그림도 그려서 게시판 같은 것들을 보기 좋게 꾸미는 일입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툭하면 그 일에 제가 뽑혀가지고 남아서 일을 했습니다. 토요일 같은 경우 아이들은 다 운동장에서 놀거나 집에 가는데 저는 교실에 남아서 그 일을 했어요. 저와 같이 남아서 일을 하는 아이 가운데는 불평이 터져 나오는 애들도 있었죠. 놀고 싶은데 자유를 빼앗겼다는 식의 불평이죠. 그런데 저는 좋았습니다. 괜스레 선생님에게 선택되어서 이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놀지 못해도, 자유를 빼앗겨도, 비록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의 선택을 받았다면 기꺼이 나의 자유를 반납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거든요. 하나님의 택하심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단어가 있는데요. 그것이 [옷]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라고 말하고 있죠. 무척 문학적인 표현처럼 들리는데요. 그런데 이 말에는 우리에게 숨길 수 없는 의무가 담겨 있습니다. 보통 옷은 우리를 가리는 것이잖아요? 외출을 할 때는 멋지게 차려 있죠. 그리고 집에 오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러니까 옷이 곧 나일 수는 없고요. 나를 가리고 더 치장하는 도구가 바로 옷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 옷을 입듯이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비밀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 안에 동정심이나 친절, 겸손, 온유나 오래 참음이 늘 있지는 않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인격이 이와 같은 성품으로 똘똘 뭉쳐 있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모습이나 인격이 완전히 변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먼저 그것을 인정하자고요. 많은 이들이 변하지 않는 자신을 보며 한탄을 합니다. 그런데 본래 우리는 잘 안 변해요. 우리의 성품과 인격이 변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의인이 되지 못하죠. 다만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것, 좀 더 엄밀히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겠다는 것은, 우리가 택하심을 입은 자녀처럼 옷을 입는 노력을 할 때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인격이 변해서가 아니라 죄인 된 우리가 의인의 옷을 매일 입고 덮는 일을 시작했기에 의인으로 간주해 주신 것이죠.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돌아보면 나는 늘 그 자리예요. 그래서 내가 믿음이 있나? 고민하는 이들도 있죠. 본래 우리는 늘 그 자리입니다.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진다고 했듯이 우리의 인격이 놀라운 변화를 얻어 자랑할만한 인격이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죄인인 우리를 언제나 덮어주실 그분의 보혈이고, 또한 내가 매일 나를 가리고 덮으며 의의 옷을 입는 나의 매일의 노력이 바로 영성이고 변화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해요.

 

오늘도 의로운 옷을 입고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되기를 빕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이해와 친절, 겸손과 온유, 용납과 용서의 옷을 입고 타인과 사회를 맞이하는 우리 되기를 빕니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고,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선택받은 자녀로 사는 오늘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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