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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골로새서묵상일기

골로새서묵상일기 43 -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골로새서 3:18~19   아내 된 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안에서 합당한 일입니다.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은 현대 사회에서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서 순종하라는 말이 현재와 같은 남녀평등 시대에 걸맞지 않은 권면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현대 성서학자들 가운데는 이와 같은 바울의 권면을 옛 유물로 취급하는 경향도 있어요. 일면 이해가 갑니다. 마치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는 시대라면 말이죠. 그리고 순종(개역 개정본에서는 복종이라고 되어 있죠.)이라는 말이 강제적 귀속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납득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각도를 달리해서 생각해보면, 바울의 권면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하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가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2가지 측면에서 묵상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순종(복종)이라는 단어의 언어적 뉘앙스입니다. 여기서 언어학적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저도 전문가가 아니기에 되도록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헬라어는 독특한 태(voice)를 가지고 있어요. 보통 태에는 능동태, 수동태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말에도 있으니까 어려운 건 아니죠. 굳이 예를 들자면, '내가 책을 읽는다.'라는 말은 능동태가 되고요. '책이 나에게 읽힌다.'는 수동태입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는 중간태라는 것이 있어요. 이게 설명하기 좀 복잡한데요. 주어가 동사의 주체인 능동태나, 주어가 동사의 대상이 되는 수동태와는 달리, 중간태는 주어가 그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받거나, 그 행동에 자기 자신이 깊이 관여된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법이에요. 어려우시죠? 저도 어렵습니다. 아침부터 머리에 쥐가 나게 해 드려서 죄송한데요. 그냥 한 마디로 말하면, 중간태는 주어와 동사의 밀접한 연관관계를 설명할 때 주로 쓰인다고 보면 되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순종하다라는 단어가 중간태입니다. 이것을 해석하자면 순종(복종)이라는 단어가 본래 강제적인 이미지가 강하잖아요? 그런데 중간태로 사용되면서 이것이 주어인 아내의 의지와 자발성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새번역에서는 복종보다 순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같아요. 순종이 보다 자발적인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아내는 복종을 강요당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복종의 자리에 선다는 의미가 본문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남편을 세워주는 의미죠. 남편이 잘나서가 아니라, 남편의 지위가 더 높아서가 아니라 내가 앞세워줌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 아내의 자발성이 하나님의 질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읽는다면 오늘 본문이 시대착오적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세상 권위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누가 무서워서, 대단해서, 놀라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여해서 세워지는 것이잖아요? 나이가 많아서, 혹은 직급이 높아서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죠. 내가 그 세월을 인정해 줘서, 그 순서를 용납해서 권위가 부여되는 것, 그것이 질서인 거죠. 그러니 아내들은 남편을 봐 줍시다. 남자들이 다들 좀 모자라잖아요? 요즘 같은 남녀평등 사회에 이런 말이 남자들을 모욕하는 위험한 말일까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가정에서 보면 늘 나사가 하나 풀린 사람 같더라고요. 그래서 가족이 없으면, 동역자가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런 의미로 이해해 주세요. 그러니 그렇게 좀 모자란 남편을 권위 있게 세워주는 일, 괜스레 폼만 잡고 실속은 없는, 괜히 큰소리만 치고 속으로는 늘 쫄아 있는 남편들을 불쌍히 여기고 스스로 복종하며 세워주는 아내가 되어보면 어떨까요? 

 

이제 두 번째 나눌 묵상인데요. 오늘 본문에서 제게는 더 중요하게 다가온 묵상입니다. 그것은 뜬금없이 등장한 가정의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열심히 설명한 바울은 정말 난데없이 갑자기 아내에게 순종하라고 하고, 남편에게는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이 자체를 뚝 떼어 읽으면 이것은 마치 가정사의 컨설팅처럼 보이지만 골로새서 3장 전체를 놓고 보면 좀 다르게 보이죠.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 능력에 대한 첫 시험대가 가정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단순하게 부부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첫 사명이 가정에서 행하는 모습이라는 강조일지도 모르죠.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는 자녀들이 많아요. 오래전, 교회에서 존경받는 장로님 가정에서 자란 자녀와 상담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는데요.  아버지의 견딜 수 없는 언어와 물리적 폭력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그에게 가장 큰 상처는 아버지가 교회에서는 너무도 인자하고 존경받는 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이웃들이 그리스도인에게 받는 상처가 있죠. 교회에서는 너무도 거룩한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는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은,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더한 온갖 추태가 들끓는 모습에 상처를 받아요.

 

오늘 이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가정에서 제일 먼저 사용하는 것이라고요.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은 부부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아내의 복종, 그것은 그리스도의 긍휼과 용서와 용납의 시작이고요. 남편의 진실함, 그것은 그리스도의 멈추지 않는 사랑과 인내와 십자가의 용기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위에 것을 생각하는 것, 좋게 보고, 좋게 말하고, 좋게 여기고, 늘 기대와 소망으로 살아가는 그 첫 사역지가 바로 가정이라고요. 그것이 사도바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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