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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골로새서묵상일기

골로새서묵상일기 37 - 신앙의 성숙은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골 3:11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 들어서서 우리에게 위의 것을 추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을 버리고 위의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길 촉구했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길 원했으며, 이는 또한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는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이 새사람으로의 출발임을 강조했죠. 그리고 오늘 매우 중요한 본문에 이릅니다. 오늘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왜 새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새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죠.

 

'거기에는'

 

이는 아마도 이전 구절인 10절의 말씀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새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닮아가는 모습을 뜻하는 듯해요.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하고 목표하는 장성한 분량의 믿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가 담겨 있으니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차별'이었어요. 몇 차례 대비되는 단어들이 등장하는데요. 그리스인과 유대인, 이는 인종적인 차별을 뜻합니다. 할례자나 무할례자는 종교적 차별을 뜻하죠.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은 문화적인 차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야만인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헬라어를 할 줄 모르는 이들을 뜻하는 단어였고요. 스구디안이란 유럽 북부 지역에 있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민족을 말하는 것으로, 아마도 우리로 말하면 오랑캐라는 표현으로 다가오는 그런 느낌의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여요. 또한 종과 자유인은 사회적 혹은 신분적 차별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새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 땅의 것을 버리고 위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안에 스며든 차별을 배격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땅의 것에 몰두하는 일에 중심에는 차별이라는 이념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요. 그러고 보면 우리가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또한 위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차별을 배격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과 맥이 닿아 있죠.

 

어쩌면 모든 악의 출발은 차별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하나님과 다르다는 차별적 의식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죄의 길을 걸었습니다. 첫 살인자 가인은 동생에 대한 차별의식으로 내면의 분노가 폭발해 버렸죠. 차별은 창조의 원리를 부정하는 땅의 원리라는 사실을 바울은 우리에게 오늘 알려 줍니다.

 

저는 죄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죄를 싫어합니다. 죄를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많아요. 그러나 그렇다고 죄인을 차별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차별이 내 안에 들어오는 순간,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이죠. 민감한 문제인 동성애나 흉악범죄에 대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정신적 연약자들에 대한 부정적 사회 시선에서 저 또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들을 위해 기도할 거예요. 목사인 저에게 축복할 권리는 있어도 저주할 권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권리는 있어도 정죄할 권리는 없기 때문이죠. 내가 차별을 품는 순간 나는 심판자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심판자가 되는 순간, 이는 에덴동산에서 범죄 한 첫 사람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출발은 차별을 버리는 데서 시작하죠. 주님께서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 눈에 모든 생명은 존귀하고 보배롭게 보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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