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묵상일기70 - 그리스도의 길이란, 좋은 것을 찾는 길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2021. 1. 11. 07:3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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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4:8~15  요나단이 말하였다. "우리가 저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우리를 드러내 보이자. 그때에 그들이 우리에게, 꼼짝 말고 서서 자기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면, 우리는 올라가지 않고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선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자기들에게로 올라오라고 하면, 우리는 올라간다. 이것을,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셨다는 징조로 알자." 그 두 사람이 블레셋 사람의 전초부대에게 자기들을 드러내 보이니, 블레셋 군인들이 소리쳤다. "저기 보아라! 히브리 사람들이 그 숨어 있는 굴에서 나온다." 전초부대의 군인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병사에게 소리쳤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병사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너는 나를 따라 올라오너라. 주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셨다."요나단이 손과 발로 기어올라갔고, 그의 무기를 든 병사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요나단이 블레셋 군인들을 쳐서 쓰러뜨렸고, 그의 무기를 든 병사도 그 뒤를 따라가면서, 닥치는 대로 쳐 죽였다. 이렇게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병사와 함께, 겨릿소 한 쌍이 반나절에 갈아엎을 만한 들판에서, 처음으로 쳐 죽인 사람은 스무 명쯤 되었다. 이때에 블레셋 군인들은, 진 안에 있는 군인들이나 싸움터에 있는 군인들이나 전초부대의 군인들이나 특공대의 군인들이나,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땅마저 흔들렸다. 하나님이 보내신 크나큰 공포가 그들을 휘감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맹추위가 기승입니다. 한파주의보가 발령될 정도로 정말 춥네요. 이렇게 추운 날씨를 보며 옛 기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제가 중국에 처음 갔을 때였죠. 그때가 한 겨울이었습니다. 그것도 중국에서 제일 위쪽에 속하는 지역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활주로더라고요. 비행기도 많이 타보지 못했지만 활주로에서 걸어서 공항에 들어가는 시스템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휑한 활주로에서 처음 맞는 중국의 날씨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추위였어요.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지만 마치 아무 준비 없이 간 사람 모양 진짜 아무 소용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시내로 들어서면서 저는 놀라운 광경을 봤어요. 그 지역의 사람들의 옷차림이 생각보다 가벼웠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반팔 옷을 입은 사람도 봤습니다. 제 눈을 의심했어요. 그들에게는 이런 추위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인 듯했어요. 나중에 그곳에서 만난 이들과 대화에서 그 비밀(?) 하나를 들었는데요. 그들은 그저 '겨울은 본래 추운 거야!'라고 그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래요. 비밀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싱거운 이 대답이 제게는 오랫동안 상기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든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아니, 그 상황을 이기는 능력이 생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의 생각, 우리의 시선, 우리 마음이 향한 방향이 중요한 거죠.

 

오늘 요나단은 기습 공격을 감행합니다. 블레셋은 다시 한번 요나단의 공격에 쓰러지죠.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연히 자신들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작은 무리의 요나단에게 추풍낙엽이었으니 아마도 뭔가에 홀렸다는 기분이었겠죠. 그리고는 공포가 몰려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공포는 이스라엘에게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도 블레셋의 대군 앞에서 공포에 휩싸였죠. 그것은 마찬가지의 공포입니다. 그런데 요나단만은 이외였어요. 그가 용감스럽다고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그가 용맹스럽다고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지는 않잖습니까? 그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에요. 그럼에도 어떻게 다른 반응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어에 [야레]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공포와는 다른 단어이기는 하지만 두려움이라는 뜻의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하나님께 향하면 [경외]라는 단어가 되고, 하나님을 떠나면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됩니다. 똑같은 단어이지만 어디에 서 있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더 강렬한 것은 똑같은 단어에서, 똑같은 감정에서, 하나는 꼭 가져야 하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 되고, 다른 하나는 꼭 버려야 하는 불필요 가결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하면 겸손과 헌신이 되고, 자신 앞에서 사랑을 하면 이기적인 스토킹이 됩니다. 미워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주장 앞에서 말씀을 미워하면 불순종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세상의 흐름을 미워하면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단어, 나쁜 단어는 따로 없어요. 좋은 직업, 나쁜 직업도 없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어디에 서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이란, 좋은 것을 찾는 길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절망보다 희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선택하여 희망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보기에 좋은 땅, 이루어 놓은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험한 산지, 수고가 필요한 곳을 낙원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빛이 어둠에서 더 밝듯이 말이죠. 아이를 가지면 불편한 것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배가 더부룩하니 몸이 무겁고, 허리도 아프고, 메슥거리고, 혈압도 오르며, 간혹 몸에 이상 변화도 옵니다. 만약 잉태 중이 아니라면 이런 현상은 병원을 가서 빨리 고쳐야 합니다. 괴로움이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이지요. 그러나 잉태로 인한 것이라면 다릅니다. 똑같은 아픔, 똑같은 괴로움이지만 그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기에, 분명히 끝이 있고, 분명히 기쁨을 낳습니다.

고통은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고통과 두려움을 가지세요. 생명을 잉태하듯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세요. 불편해 보일지 몰라도 그 두려움에 희망이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작은 불꽃마저 짓밟아 버리겠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것은 세상의 두려움을 없애는 능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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