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묵상일기 75 - 해답은 나에게 있습니다.

2021. 1. 18. 06:46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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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4:36-40  사울이 말하였다. "우리가 이 밤에 블레셋 군대를 쫓아 내려가서 동이 틀 때까지 그들을 약탈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이도록 합시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임금님이 좋으시다면,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제사장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울이 하나님께 여쭈었다. "내가 블레셋 사람을 뒤쫓아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날 사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사울이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군지휘관은 모두 앞으로 나오시오. 오늘 이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보겠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허물이 나의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감히 그에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울은 온 이스라엘 군인에게 계속해서 말하였다. "귀관들은 모두 이쪽에 서시오. 나와 나의 아들 요나단은 저쪽에 서겠소." 군인들이 모두 사울에게 "임금님이 좋으시다면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감사로 시작하는 하루이길 빕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특별히 의미 있는 날들이 있죠. 생일이 대표적입니다. 괜히 그날은 뭔가 특별해 보입니다. 누군가를 만난 날, 어떤 결실을 이루는 날, 추억이 깃든 날들은 소중하고 의미가 있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모든 날이 똑같습니다. 뭐하나 다르지 않은 똑같은 시간, 똑같은 질량의 하루죠. 그럼에도 특별한 것은 그 시간이 아니라 내가 부여한 의미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 마음이 그 시간을 좌우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시 말하면, 내 마음에 따라, 내 기분에 따라 그 하루가 달라지는 거죠. 아침에 일어나 우리가 감사의 첫 입술을 떼는 이유도, 나의 마음이 오늘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아침, 이것 내 마음에 달렸어요.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첫 사역입니다. 이 아침을 좋은 아침으로 만드는 일 말이죠.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되길 빕니다.

 

 

사울 왕은 왜 잘못된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방향키를 제공합니다.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걷게 만드는 우리 안의 문제를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죠. 사실 우리는 왜 우리가 잘못을 하게 되는지 잘 모릅니다. 왜 내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지, 왜 내가 스스로를 괴롭히고 찌르며 힘겨워하는지 잘 모릅니다. 사실 자신이 행복한 생각에 빠지고 싶지 않은 이들은 없겠죠. 누구나 기쁨 가운데 머물길 원하고, 언제나 좋은 생각 속에 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는 데 있어요. 기뻐하고 싶은데도 기쁘지 않고, 좋게 생각하고 싶지만 좋은 생각보다는 나쁜 생각이, 이해보다는 오해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렇게 아파하죠.

 

사울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하는 것마다 뭔가 늘 어긋나죠. 이미 그는 엉뚱한 금식 조치로 그의 백성들을 늪에 빠지게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또 다른 무리수를 두죠. 그는 내친김에 블레셋을 더욱 몰아붙이고자 합니다. 블레셋의 위협에 벌벌 떨었던 때에 비하면 완전히 달라진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누구의 힘이었을까요? 누가 그 많은 블레셋 군을 스스로 자멸하게 만들었을까요? 사울은 그것을 알고 있을까요? 게다가 문제는 더 있습니다. 요나단이 블레셋을 쳐 올라갔을 때 그곳이 게바 지역이었음을 기억하실 거예요. 게바는 블레셋 땅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땅이었으나 블레셋이 침략하여 본거지를 둔 땅이었죠. 그러니까 이 전쟁의 목적은 자신의 땅을 되돌려 놓는 것이지 블레셋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사울은 지금 거저 얻은 상황을 주어먹으려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사울을 말리는 것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이런 결정을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전쟁이며,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전쟁이었으니까요. 아차! 싶었는지, 아니면 억지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울은 하나님께 길을 묻는 행동을 합니다. 진심 여부는 우리가 알 수 없으니 묻어 두기로 하죠. 우리는 진심 어쩌고 하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요. 진심이건 아니건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진심이 아니어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진심이 있다고 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하기 싫어도 매일 습관이 되는 운동이 몸을 건강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웬일인가요? 사울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난처하게 된 것은 사울이었죠. 내친김에 여세를 몰아 전쟁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니 어쩝니까? 초조했을까요? 혹시 묻지 말고 그냥 밀어 부칠 걸 하고 후회했을까요?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전도서 기자는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없다'(전도서 7:20)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을 빌어 강조했죠. 저는 인간이 죄를 짓고 안 짓고의 경계선에 서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이 너무도 잘 아시죠. 만약 우리가 죄의 유무에 우리의 신앙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주님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죄를 짓고 안 짓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죄 앞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받는 존재로 우리가 서야 거듭날 수도 있고, 새로울 수도 있으며 성화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어떨까요? 왜 하나님은 사울의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은 누구의 문제였을까요? 이미 우리는 사울의 무리수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편의에 따라 하나님을 좌지우지하는 그의 성향을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역함이 아닌, 자신이 곧 하나님이 되어서 사역하기를 원하는 그의 본성을 보았습니다. 이는 마치 에덴동산에서 첫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어요. 그런 그의 성향이 계속된 무리수를 두게 하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그의 그 성향은 무엇일까요? 그 자신의 길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아니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눈 가리게 하는 그의 성향은 무엇일까요? 응답을 받지 못한 사울은 그 이유를 찾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성경은 사울의 입을 빌려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늘 이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보겠소."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남에게서 찾습니다. 세상을 남의 눈을 통해 보려고 하죠. 남의 시선에 민감한 것에서부터, 남 탓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무수히 많은 핑곗거리를 가지고 있죠. 그런데 우리는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나의 눈이 밝으면 세상을 밝게 볼 수 있고요. 나의 눈이 탁하면 세상을 탁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 눈의 들보'에 대해 말씀하시죠. 누구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옳지 않아요. 내가 지적하는 일들이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티여도, 제 아무리 허물이어도, 나의 판단이 그 티를 가를 수 없습니다. 나의 눈이 편협하기 때문이죠. 이미 나만의 경험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나를 씻는 시간입니다. 나의 들보를 빼내는 훈련이죠.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은혜입니다. 내 안에서 문제를 찾고, 내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용서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의 마음이 사랑이시기 때문이죠. 우리에게는 답이 없어요. 그 눈으로 우리를 보시기에 해결책이 있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에게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세상이 바뀌지 않아요. 바로 나로부터 입니다. 내 눈이 맑아야 세상을 맑게 볼 수 있고, 내 마음이 긍휼로 덮여야 보이는 모든 것에 해결책이 있어요. 내 마음을 통해 세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서 해답을 찾지 마세요. 그것이 나를 오답으로 이끄는 지름길입니다. 해답은 나에게 있습니다. 변화의 시작도 나에게로부터 이고, 유일한 소망도 바로 '나'입니다. 세상은 내가 눈을 뜰 때부터 존재하니까요. '나'라는 프리즘(Prism)을 통해 세상이 오색찬란할 수도, 우중충한 흑빛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어요. 그렇게 나를 통해 세상을 비추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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