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묵상일기77 - 하나님이 버리라시면 그냥 버리는 겁니다.

2021. 1. 20. 07:03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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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5:9   그러나 사울과 그의 군대는, 아각뿐만 아니라,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들과 가장 기름진 짐승들과 어린양들과 좋은 것들은, 무엇이든지 모두 아깝게 여겨 진멸하지 않고, 다만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골라서 진멸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는 폭풍 같은 하루였습니다. 밀려오는 기도들 속에 가슴 조리며, 또 가슴을 치며 보낸 하루였죠. 그래도 단 하루 만에 상황들이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움이 있지만 노아의 수술은 잘 이루어졌고, 제 발목까지 시큰거리게 했던 사고도, 뜻밖의 질병도 이제 치유의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남의 아픔에, 그리고 기도제목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시는 여러분의 간절함이 모든 해결의 시작이라는 데는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하나 쌓이는 기도 동참의 댓글은 제게도 위로와 감동이 되니 당사자에게는 어떻겠습니까? 또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요? 이렇게 함께하는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에 비해 잊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응답된 기도의 감사죠. 제 말씀은 응답된 기도에 대해 감사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한 모든 일의 결과를 알기 원하고, 또 그 결과에 감사해마지 않습니다. 단지 소망과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비하자면 그렇다는 말씀이에요. 그러고 보면 이루어진 기도들은 너무 많아요. 두렵고 떨리던 시간은 지나갔고, 가슴 졸이며 불안하던 마음은 평온을 되찾습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당연하죠. 잠시 뒤돌아보면 100%는 아닐지라도 큰 틀에서 바라던 대로 되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응답에 대한 기억은, 바라던 소망만큼 우리 마음에 크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말씀드린 바 있죠? 우리 신앙의 기초는 기억이라고요. 그분이 내게 하셨던 일, 이루신 일, 도우신 일, 함께하신 일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는 앞날에 대한 소망의 기초라고요.

 

저는 가끔 우리가 기도했던 일을 되돌아봅니다. 아픈 이들을 위한 기도는 물론, 원하고 바라던 일들에 대한 기도들이 그야말로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기억해요. 물론 그때는 알지 못했으나 지나고 보니 더욱 큰 그림으로 임하신 하나님의 계획도 있었죠. 그러니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함께 기도의 제목을 나누고 같이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우리의 중보기도는 그렇게 쌓여서 바로 나의 기도가 됩니다. 남을 위해 함께 한 여러분의 기도는 마침내 나를 위한 기도가 될 테니까요.


강해설교로 유명하신 존 맥아더 목사님의 책 [예배]에는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어떤 목동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고 살찌고 튼실한 양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고르려고 고심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마침 그중 더 크고 튼실한 양이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어요. 목동은 생각했습니다.

 

"다리가 부러졌으니 더 살기도 힘들 텐데 이 양을 드리자. 분명 이 양은 더 크고 튼실한 양이잖아. 제물로 바치기에는 최고의 양이야!"


그리고 맥아더 목사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 양을 하나님께서 과연 받으실까? 하고요. 

최고의 것, 최상의 것, 최대의 것에 우리는 목을 매지만 하나님은 최고가 아니어도, 최상의 것이나 최대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우리의 중심을 받으십니다. 그분에게는 우리의 중심만큼 최고의 것이 없으시니까요.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 놀랍도록 감동적인 의식, 빈틈없이 짜임새 넘치는 프로그램, 그것들로는 하나님께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에게 멋질 뿐이죠.

이스라엘은 이제 아말렉과의 전쟁에 돌입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사울에게 전달하죠. 사울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말렉과의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에게 전멸을 요구하십니다. 이 명령은 잔혹하리만큼 거칩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이니까요. 이런 구절들은 구약에 수없이 등장합니다. 이를 읽는 독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질 때가 있죠. 저는 이 장면을 조금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 안에 퍼져 오르는 악한 영향력과 같은 것으로 말이죠. 우리의 마음이 상하면 모든 말들이 비틀려 들리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되죠. 내 안에 조그마한 거리낌이 있으면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집니다. 그래서 악한 것은 조금도 남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작아도 씨앗은 자라나기 때문이죠. 어쩌면 이 명령은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이어지는 사울의 모습 때문입니다.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치적으로 이용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왕끼리 대우를 해 주는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깝다 여기는 것들은 골라서 취했습니다. 마치 '이것쯤이야'하는 마음으로 아까운 것과 하찮은 것을 구분합니다. 이런 모습은 전쟁을 치르지 않는 우리에게서도 수없이 볼 수 있죠. '나 하나쯤이야!'에서부터 '이런 것은 괜찮겠지!'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등 수없이 우리가 판단하고 허용하는 일들이 있죠. 은혜받고 주님께 헌신을 다짐한 후, 내 안의 문제들을 정리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어김없이 이런 말들을 내뱉게 되죠.

 

내가 아까워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보잘것없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쓸모없고 값없이 여기는 것이 하나님께는 귀중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작다고 부끄러워할 이유도, 크다고 우쭐될 이유도 없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내 중심이 하나님께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께는 최고, 최상, 최대의 것이 됩니다. 아까워하지 마시고 버리세요. 내 중심을 하나님께 두면, 버려서 비어진 것은 주님이 채우실 겁니다. 내 중심을 주님으로 채우면 내가 잘라낸 가지들에서 꽃이 필 거예요. 하나님이 버리라시면 그냥 버리는 겁니다.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니 나에겐 그분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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