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묵상일기71 - 신중함의 결론은 단호함입니다.

2021. 1. 12. 07:42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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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4:16~19  베냐민 지역의 기브아에서 망을 보는 사울의 파수꾼들이 건너다보니, 수많은 블레셋 군인들이 아우성을 치며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러자 사울이 자기와 함께 있는 군인들에게 명령하였다. "우리 가운데서 누가 빠져나갔는지 조사하여 밝혀 내어라!" 사람들이 조사하여 보니,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드는 병사가 없었다. 그러자 사울은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라고 말하였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었다.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 블레셋 진영에서 일어난 아우성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래서 사울은 제사장에게 궤를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거뜬히 일어나셨나요? 혹시 추위에 아직 이불을 붙들고 계시지는 않으시겠죠? 아침에 일어나 매일 기도와 묵상을 생활화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침의 기상이 늘 거뜬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는 더 눕고 싶고, 어느 때는 일어나기 싫을 때도 많습니다. 오늘 새벽이 딱 그런 날이였네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예전 시간보다 늦었습니다. 그렇다고 푹 자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게으름 피우며 누워있을 때가 있죠. 눈만 감았지 머리는 말똥말똥한 상태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잠의 목적이 무엇일까?' '쉼의 목적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생각은 여기까지 다 달았습니다.

'안식의 목적, 안식의 궁극적인 능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의 목적은 아침이라고요. 잠의 목적은 깸에 있고, 쉼의 목적은 다시 일어섬에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안식을 원하지만 안식이 우리 삶의 목적은 아니죠. 그렇다면 정말 잘 잤다는 것은 아침에 드러나는 것이겠죠? 좋은 아침을 맞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잘 쉬지 못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네요. 이 시간 함께하시는 분들은 모두 좋은 아침을 누리시길 빕니다. 그래야 나의 쉼도, 잠도, 안식도 의미 있기 때문이죠. 

 

요나단은 블레셋 진영을 휘젓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그런 사실을 이스라엘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자 사울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겠죠. 그리고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조사를 하는데요. 요나단과 이름 없는 병사 하나의 자리가 빈 것을 확인합니다. 요나단과 그 병사가 혈혈단신 적진을 누비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죠.

저는 여기서 그 옛날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대 결투장인 황산벌이 떠올랐습니다. 배수진을 친 백제의 장수 계백의 기백에 눌려 신라는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 그때 신라의 어린 화랑 관창이 홀로 적진에 뛰어들죠. 이는 신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묘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투는 아시다시피 끝이 납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윗 또한 그랬습니다. 골리앗에게 희롱을 당하면서도 그 기세에 눌려 대꾸조차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어린 다윗이 서죠. 그는 용감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들고 골리앗에 맞섭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각성을 합니다. 똑같은 장면이 지금 연출되고 있는 것이죠. 자신의 아들이 적진 깊숙이 뛰어들어 싸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울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군대가 용감하게 길을 뚫고 있다면 왕으로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것이 당연하죠. 그러나 사울은 우물쭈물합니다. 오락가락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어떤 결정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궤라고 적혀있는 본문은 아마도 에봇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도구로 사용되던 옷이었죠. 진짜 웃기는 사실은 그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의복이었다는 점입니다. 방금 전 사무엘에게 그리 혼이 나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울이 보입니다.

지금 사울은 영적으로도 혼돈된 상태이고, 정서적으로도 우유부단하죠. 하나님의 선지자들, 하나님의 사사들의 권세는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특출 나지도, 그렇다고 용감하지도 않았어요. 기드온 같은 경우는 겁쟁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사로 부름 받고는 달라졌어요. 그들이 갑자기 용감해지거나 능력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어떤 기질이 아닙니다. 그들의 진정한 능력은 가고 서는 것을 알았다는 데 있습니다. 들고 나는 때를 알고, 일어설 때와 앉을 때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이죠. 그런데 사울은 그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나의 성질이나 기질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겁쟁이였던 내가 갑자기 용맹한 전사가 되는 것도 아니죠. 하나님의 영은 단지 해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알게 합니다. 그 권세는 푯대를 들어야 할 때와 기도할 때를 알게 하죠. 

신중함과 우유부단은 천양지차입니다. 우유부단은 그냥 가만히 있는 거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죠. 그러나 신중함은 가만히 있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신중함의 능력은 단호함에 있어요. 생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죠. 생각하는 것은 가만히 고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 생각을 현실화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실천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죠. 기도는 어떻습니까? 기도는 골방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골방이 필요한 이유는 그 골방에서 일어나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행동이 되는 셈이죠.

신중함의 결론은 단호함입니다. 기도의 결론은 행동이고요. 생각의 끝은 실천입니다. 그 신중함이 우유부단이 되지 않기를, 기도는 장식이 되지 않기를, 생각은 망상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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