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49 - ‘다른 것’을 생각하세요.


갈 5:18~21
그런데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 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맑은 공기와 산들바람이 부는 평온한 새벽이네요.
문득 이 시간 이런 생각이 듭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거센 바람이 유리창을 때리는 아침,
걱정과 염려로 시작하는 것은 어쩜 당연하겠죠.
그런데 오늘처럼 이렇게 평온한 아침,
우리는 평온함을 기뻐하고 감사하지는 않는 것 같은 마음이에요.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쁜 것을 나쁘다 느끼는 것만큼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오늘은 늘 있어왔던, 그래서 이제 너무도 당연한 듯한
좋은 것들을 감사할 줄 아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평범하지만 좋은 일, 좋은 사람, 좋은 가게, 내가 가는 식당,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할 줄 아는 하루길 빕니다. 


아름다운주님의교회가 첫 예배를 드린 때가
2001년 10월 7일이었습니다.
올해로 만 19년이 되었네요.
지나온 세월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적과 같은 일들을 경험하기도 했고,
은혜로 눈물을 흘린 일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늘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에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마주쳐야 했고,
아픔과도 싸워야 했던 시간들이었죠.

그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꼽으라면,
아마도 그것은 생각과의 싸움이었던 것 같아요.
교회를 개척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어요.
그건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이었습니다.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 맞아!’
‘원래 그랬어..’
이 원래라는 말 앞에서는
어떤 심오한 철학도, 생각도, 설득도 필요 없었어요.
그냥 원래 그랬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래서 교회 간판을 달지 않는 일도,
교회 건물을 갖지 않는 일도,
기존의 교회 형식을 깨는 일도,
늘 이 원래라는 철학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를 세우는데만 국한되지 않았어요.
목회를 하며 사람과의 교제가 늘면서도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또 ‘원래’였습니다.

‘나는 원래 그래요.’

원래 그렇다고 못 박아놓은 생각에
다른 생각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을 어떤 틀에 규정해 놓으면,
더 이상 그 틀을 넘어서기가 어렵죠.

어릴 적에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본 장면이 있어요.
그 집에는 닭을 여러 마리 키우고 있었는데요.
닭과 관련된 사업을 하는 집은 아니었는데,
마당에 닭들이 많았어요.
정신없이 마당을 휩쓸고 다니는 닭들 중에
한 마리 닭은 끈에 묶여 있더라고요.
친구는 재미난 것을 보여주겠다며
저를 그 닭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닭의 끈을 풀어주더라고요.
저는 이내 뒤로 물러섰습니다.
닭이 도망칠 것을 대비해서였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닭은 제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더라고요.
그 친구는 그 장면을 보며 주면서 
재밌지 않냐? 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해주더라고요.
그 설명이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하룻밤을 끈에 묶였던 닭은,
자신이 끈에서 풀려도 끈만 보면 묶여 있는 줄 착각해서
도망갈 생각을 아예 안 한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친구는 풀어준 끈을 닭 앞에 던져 놓았더라고요.
아마도 닭이 끈을 보면서 여전히 자신이 묶여 있다고 인지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우리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원래 그래’라는 말에서 
저는 묶여 있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원래 인간은 죄 안 짓고는 못 살아!’
‘원래 삶은 괴로운 거야!’
‘원래 인생은 다 그래’

많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묵상하는 것을 봅니다.
'죄짓지 말아야지',
'죄는 나쁜 거야',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야 해'
이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좋은 생각처럼 보이죠.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처럼 보이니까요.
그런데 실상은 그 자체가 죄에 묶여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령 이런 예를 들어보면 어떨까요?
공무원이 뇌물을 받으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하겠죠?
그래서 공무원은 그런 뇌물을 받지 않도록 교육도 받아요.
그런데 민원인을 만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요.
‘이 사람이 뇌물을 줄지도 몰라… 조심해야 해’
그래서 늘 경계하고, 늘 의심하고, 늘 거리를 둔다면 어떨까요?
그것이 정상일까요?
뇌물 받지 않으려는 공무원의 좋은 본보기일까요?

뇌물에서 자유는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 생각에서 뇌물이라는 단어가 사라져야 하죠.
그 생각에서 뇌물이 사라지려면,
민원인을 만날 때 뇌물이 아닌 봉사와 도움, 이해로 만나야 하죠.
죄에서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묵상하지 않으려면,
죄가 아닌 은혜와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육체의 행실을 나열합니다.
세어보니 15개나 되네요.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15개의 행실을 다 읽어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행실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 행실이 무엇이냐 묵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정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생각을 하며 사세요.
죄를 묵상하지 말고, 은혜를 묵상하며 사세요.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을 대비하며 살지 말고,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을 기대하며 사세요.
의심과 경계가 나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정작 나를 지켜주는 것은 믿음과 은혜예요.
그러니 의심과 경계가 아닌 믿음과 은혜를 묵상하세요.
‘안 되면 어쩌나~’ ‘힘들면 어쩌나~’ 이런 것 말고,
‘잘 될 거야’ ‘힘주실 거야’ 이런 걸 묵상하세요.

혁신은 ‘원래’가 아닌 ‘다른’ 생각에서 나옵니다.
변화는 ‘하지 않는 것’이 아닌 ‘하는 것’에서 나와요.
오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늘 지적질하던 버릇에서 칭찬으로,
늘 나쁜 것을 보았던 시선에서 좋은 것을 보는 시선으로 바꿔보면 
어떤 삶이 일어나는지 한번 실험해 보면 어떨까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