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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46 - 초심을 잃지 마세요.


갈5:7~10
여러분은 지금까지 잘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을 가로막아서,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였습니까? 그런 꾐은 여러분을 부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다른 생각을 조금도 품지 않으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선한 바람과 상쾌한 공기는
완연한 가을 내음을 자아냅니다.
이렇게 바람 하나에도,
공기 한 줌의 호흡에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것은,
새로이 주시는 또 다른 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열 수 있는 여유 때문이겠죠?
오늘도 밝은 미소로
하루를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침소봉대(針小棒大)라는 말이 있죠.
말 그대로 하면,
작은 바늘을 가지고 커다란 몽둥이라고 우긴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일을 심하게 과장해서 부풀려 말한다’는 뜻이죠.

과장, 허풍, 부풀림, 포장..
이런 말들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분명 잘못이긴 한데
왠지 그리 심각한 잘못처럼 여기지 않는 경향이
우리들 마음에 있지 않아요?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요?

사실 생각해보면,
과장되고, 부풀린 것이,
아예 없는 말을 만들거나 거짓말보다
훨씬 위험하고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허풍과 과장에 관대한 이유는,
그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과대포장, 과장광고의 폐해가 지적된지도 오래죠.
그럼에도 우리가 가볍게 넘어가는 이유는,
그 포장 속에 실체가 있긴 하기 때문이에요.
없는 것을 포장만 한다면 몰라도
실체가 있다면 용서가 되는 분위기가 깔린 거죠.

그런데 그래서 더 위험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있어 보이고,
어느 경우, 전혀 다른 결과로 이끌어지기도 하죠.
가짜 뉴스는 거짓말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허풍이나 과장으로 만들어지죠.
그래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그래도 실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유대문화에서 주식은 빵입니다.
대부분 빵에는 누룩을 넣는데요.
유일하게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유월절이에요.
누룩을 넣지 않았다고 해서,
무교병(無酵餠)이라고 하고,
그런 절기를 무교절(無酵節)이라고 하죠.

무교절의 유래는 출애굽 과정에서 나옵니다.
이집트 탈출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어요.
장자의 죽음을 넘기고 부랴부랴 짐을 챙긴 이스라엘 백성은
누룩을 넣어 부풀린 빵을 만들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들은 무교병을 보따리에 넣어 챙긴 후
여행길을 나섰죠.
그리고 만나가 내리기 전까지 그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무교병을 고난의 빵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이렇게 무교병을 먹는 절기를 책정하신 이유는,
그때를 기억하라는 의미가 다분합니다.
그 고난의 때, 
이집트에서의 해방을 이끄신 그때,
먹을 물을 주시고, 만나를 주시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신 그때,
그때를 기억하는 의미가 무교병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삶이 달라지면
기억도 달라집니다.
각자가 가진 기억은 팩트가 아닙니다.
다 자기 나름대로의 각색이 된 추억이죠.
그래서 점점 자신에게 유리하고, 자신의 시각만이 존재하는
그런 기억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기억들은 나의 삶을 변질시키는 도구로 이용되죠.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랬습니다.
값없이 주신 은혜, 거저 받은 사랑에 감격했던 기억이 가물거리자
이제는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증명하고 싶어 졌던 거죠.
그런 것 있잖아요?
나는 어느 동아리 같은 곳에 들어갈 때
아무 조건 없이 은혜로 들어갔는데요.
이제 다음 사람을 받을 때는
뭔가 조건을 걸어야 할 것 같고 
눈에 보이는 무슨 표증을 정해야 할 것 같아서
오히려 나서서 입장을 막고, 방해하고,
또 다른 것을 요구하는 내가 되어 버린 것 같은 것 말이죠.

우리는 늘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리죠.
그것이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혹은 헌신으로 이름으로 드립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헌금이 아니에요.
우리가 첫 열매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우리의 첫사랑, 첫 마음, 첫출발이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주님께 받은 구원의 자리,
주님께 받은 사랑의 은혜,
더 나아가
헌신의 첫 마음,
결단의 첫 순종,
일을 시작하게 된 첫 동기,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초심을 잃지 마세요.
어떤 일이든, 어떤 과정이든,
초심을 기억하세요.
과장된 누룩 다 제거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추억들, 침소봉대하지 말고,
그때 가졌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세요.
내 마음을 다시 세울 유일한 방법은,
그 초심에 서는 것입니다.
어쩌면 거기서 해답을 찾게 될지도 몰라요.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무교절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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