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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40 - 아무리 화려한 과거여도 그때보다 지금이 좋습니다.


갈4:8~11
그런데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본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쌀쌀하다 못해 춥기까지 해서 창문을 닫았습니다.
이번 주는 마치 두 계절을 사는 느낌입니다.
여름이 되어도, 겨울이 되어도,
이 아침은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아픔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어려움이 태클을 걸어도,
반드시 새로운 시간이 오듯이 말이죠.
그래서 오늘을 기대하는 아침이었으면 해요.
기대한 만큼,
아니 기대한 것보다 더 풍성한 오늘 되시길 빕니다.

1973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은행 강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은행에 있던 많은 이들이 인질이 되어서
자그마치 6일 동안 경찰과 대치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인질극의 은행강도 사건은 종종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지금까지 회자되며
많은 학자들과 연구가들의 대상이 되고 있어요.
왜냐하면 풀려난 인질들의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주로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극심한 공포심에 사로잡혔던 이들은 
트라우마를 겪게 되죠.
이 사건의 당사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양상은 매우 달랐어요.
보통의 경우,
그 두려움과 공포심은 적개심과 경계심으로 표출되는데 반해
이 사건의 인질들은 오히려
자신을 억압했던 강도들에 대한 연민과 애착을 느끼는 상태였습니다.
상식 밖의 결과에 연구자들은 당황했어요.
그리고 새로운 정신의학적 병명을 내놓았습니다.
이른바,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고 하죠.

비교적 최근에 미국 동물보호 단체 활동가들이,
수족관에 갇혀있는 고래 한 마리를 
몰래 바다로 돌려보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수족관에 갇힌 고래들의 폐사를 경험하며
수족관 폐쇄 운동이 일어나고 있죠.
그런데 문제는,
바다로 돌려보낸 고래가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수족관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에요.
이를 두고 또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대부분 고래의 자체적인 판단이라는 결론이었어요.
그러니까 야생에서 사는 것보다
갇혀서라도 안전하게 보호받고, 먹을 것 걱정 없는 수족관을 선택했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이해가 가시나요?
어떤 일이 그 안에서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어쩌면 다시금 스스로
족쇄의 자리로 돌아가거나 그리워하는 모습은
짐짓 이해가 쉽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런 일들은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대표적인 것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홍해가 앞을 가로막자 동요했어요.
그리고 다시 이집트의 종살이로 돌아가고자 외쳤죠.
그렇게 모진 일거리의 혹사로 울부짖음이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그 나라, 그 시간, 그 상태로 그들은 돌아가고자 했죠.
광야에서도 걸핏하면 그 병이 도졌어요.
수고하지 않고도 얻어지는 식량이지만
어제 나온 반찬이 오늘도 나오면 어김없이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예 시절을 그리워했어요.
과연 노예 생활이 더 좋은 것이 맞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이와 같은 상황을 언급합니다.
마치 스톡홀름 증후군을 앓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과거로 돌아가겠냐고 말이죠.
하나님을 모르던 때, 
하나님을 오해하던 그 시절로 우리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자유가 아닌 올무의 시절로,
자발적이 아닌 강압의 세월로 나를 돌릴 수는 없어요.

가끔 이렇게 말할 때가 있죠?
‘그때가 좋았지!’
과거를 회상하거나 추억할 수는 있어도
그때가 지금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거는 현재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어제에 사는 내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나이기 때문이죠.
알았다면 안대로 살아야 합니다.
알았는데도 모른 어제처럼 산다면
그것이 위선이에요.
바울은 우리의 현 상태를 이렇게 설명하죠.
‘우리가 하나님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주셨다’라고요.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주셨다는 말이 확실히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뜻이죠.

아무리 편해도 노예는 노예입니다.
아무리 고달파도 아들은 아들이고요.
아무리 좋아도 과거는 과거입니다.
아무리 힘겨워도 현재는 현재죠.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옳은 길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가는 길을 옳게 만들면 됩니다.
그래서 나의 지금이 어제보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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