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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34 - 그.래.도. 사랑입니다.


갈3:23~24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 창밖의 바람이 차네요.
창문을 닫았습니다.
창문을 닫으며 피식하고 웃었네요.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언제쯤 이 여름이 갈까?를 외쳤는데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계절이 가며
하나님의 시간은 정.확.히 흐릅니다.
아무리 영원할 것 같은 세상의 권세도,
아무리 강한 죄의 그늘도,
주님의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어요.
그분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사랑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하루를 삽니다.
앞이 안 보여도,
많은 방해가 있어도,
내가 알지 못해도,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음을 잊지 않는 하루이길 빕니다.

오늘도 바울의 율법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는 율법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죠.
율법을 두 가지의 직군으로 비유하는데요.
하나는 감시자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교사입니다.
자칫 우리는 이 비유를 긍정적으로 바라볼지도 몰라요.
감시라는 말이 좀 무섭고 무거워서 그렇지,
아이를 다치지 않도록 돌보는 것도 감시고,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지켜보는 것도 감시일 수가 있죠.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가르침의 통로로서 교사의 역할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긍정적 측면이 아닌 부정적인 측면에서 비유가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새번역에서 ‘감시’라고 번역된 단어는 
개역성경에서는 ‘매인 바’ 되었다고 번역했는데
이는 우리가 해를 당하지 않게 보디가드 역할을 의미한다기보다
벗어나지 않게 억압하고, 강제로 묶어두는 의미가 더욱 강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교사 역시,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디다스칼로스]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파이다고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요.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주로,
귀족의 자제들을 돕는 노예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죠.
그러니까 그들이 어떤 지식이나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통학을 돕고, 신변의 안전을 위해 감시하는 역할을 한 거죠.
그래서 이 단어는 통제나 강제의 의미가 훨씬 강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밝히죠.
그래서 율법은 겁을 주고, 불이익을 극대화해
우리를 압박하는 도구로서 우리를 통제하려 하죠.
어쩌면 미신이 그런지도 몰라요.
지키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강박을 주고,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율법주의 신앙이 딱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이는 경외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죠.

평상시 늘 제게는 떠나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왜 우리는 틀에 갇히기를 좋아할까?라는 질문이에요.
우리는 규칙을 정해놓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을 편안해하죠.
그 수준을 넘어,
강한 힘으로 강제하고 강압할 때 우리는 오히려 말을 더 잘 들어요.
무서운 선생님 아래서 숙제를 더 잘하고요.
상벌이 있는 규율 아래서 더 열심히 하죠.
반면, 자유가 주어지고, 권리를 부여하면 헤매기 시작합니다.
나에게 권한이 주어지면 어쩔 줄 몰라해요.
두려움이 사라지면 자만과 방종이 판을 칩니다.
무서운 선생님보다 이해심 많고, 나를 존중해주는 선생님은
쉽게 보고 무시하기 십상이죠.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요?

바울의 싸움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용서와 긍휼, 이해와 배려의 하나님을 선포하니
사람들이 힘겨워하기 시작했어요.
마치 자유가 주어지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죠.
노예근성이라고 하나요?
시키는 일만 하다가 이제 스스로에게 권리가 생기니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당시 갈라디아의 율법주의는 그런 상황에서 시작된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율법주의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죠.

때론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려움을 시전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우리가 순종을 잘할 텐데 말이죠.
때론 하나님께서 사랑이 아니라 상급으로,
긍휼이 아니라 성과로,
이해가 아니라 기부 앤 테이크로 일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우리가 훨씬 일사불란하게 주님께 나아갈 텐데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도.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래도 사랑의 시작이에요.
십자가가 버림받아도 사랑,
주님의 이름이 짓밟혀도 사랑,
능멸과 조롱을 당해도 사랑,
심지어 저주하고 공격해도 사랑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으니까요.
그것만이 답이니까요.

약해 보여도 그.래.도. 사랑입니다.
하찮게 보아도 그.래.도. 사랑이에요.
아무런 효과가 없어 보이고,
오히려 쉽게 보고, 무시해도,
그.래.도.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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