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33 - 좀 아프면 어때요?


갈3:21~22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중개자가 준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롭게 됨은 분명히 율법에서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창 너머 들려오는 차 소리가
오늘따라 경쾌하게 들립니다.
아직도 어두운 새벽인데
어디를 향해 그리 달리는지 모르겠네요.
이른 새벽녘부터 달리는 차는,
분명, 달콤한 잠을 물리치고 나왔을 테죠.
피곤을 뒤로하고 나선 길,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는 발걸음은
그렇게 아무 일 없는 것보다 아프고 힘들어요.
그래도 할 일이 있다는 사실에,
그 고단한 발걸음이 경쾌하게 들리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힘겹게 일어난 순간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하루였으면 좋겠어요.

바울의 자문자답은 계속됩니다.
율법이 무엇이냐에 이어 이번 질문은,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은 적대적인가?'라는 거예요.
사실 바울은 반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율법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고 말이죠.
그럼에도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이 율법 무용론을 주장한다고 공격했을 것입니다.
사실상 율법은 악한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비난했을 거예요.

주로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공격은
극단적입니다.
이분법적인 접근으로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죠.
'너는 어느 편인가?'
'너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그런 강요에는 극단적인 대립이 존재합니다.
'선하게 살 것인가? 악하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은 갈등합니다.
온전히 선함을 추구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머뭇거리다 보면 어느덧 죄라는 허울이 나를 덮죠.
그렇게 죄를 묵상하는 인간으로 전락합니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하죠.
‘은혜를 받았으면 늘 기뻐야지’
‘슬프고 우울한 것은 믿음이 아니야’
그렇게 감정을 획일화시켜 버리죠.
심지어 병이 들어 아픈 것조차도 악하기 때문이라고 하죠.
그래서 아픈 것을 숨기고 무슨 죄인이 된 듯 여깁니다.

우리는 아프면 안 되나요?
좀 우울하면 안 됩니까?
좀 슬플 때도 있잖아요?
우리는 그러면 안 되나요?

사실, 우리는 슬픔을 알기에 기쁨도 압니다.
아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아야 온전한 기쁨을 알죠.
아파 본 사람이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요.
시장한 것이 반찬이 되기도 합니다.
이별이 만남을 더욱 빛나게 하고,
실패가 또 다른 성공을 부르는 비결이 되기도 해요.

“당신은 아무 일없던 사람보다 강합니다”

서점을 들러 책 구경하기 좋아하는 제게,
한동안 발길을 멈추게 했던 책 제목입니다.
이 책을 펼쳐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 나에게 많은 일이 있다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아’

우리는 슬픈 일을 당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도 하죠.
한동안 부끄러움에 고개를 못 들기도 하고,
아파서 일어나기조차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왜 이런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 같은지,
왜 나는 다른 사람처럼 평온하지 않은지를 한탄하기도 하죠.
마치 버림받은 사람처럼,
마치 세상에 혼자 있는 사람처럼 말이죠.

율법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합니다.
얼마나 연약한지,
얼마나 바보 같고 어리석은지,
내게 묻어 있는 부끄러움이 얼마나 많은지,
율법은 그렇게 나를 정죄하고,
나를 아프게 하고, 또 못을 박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주님의 구원이 귀한 거예요.
아파서 또 다른 성숙을 만들듯이,
고통을 통해 강해지듯이,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주님의 은혜는 더욱 빛나는 거예요.
그러니 아파도 괜찮습니다.
좀 아프면 어때요?
율법이 끝이 아니라 그 완성자인 예수님이 계시듯이,
아픔도 끝이 아닐 거예요.
믿음은 슬픔이 끝이 아님을,
고통이 마지막이 아님을,
정죄가 아닌 구원이 우리 삶의 결과임을 믿는 겁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