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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30 - 주님은 우리를 구속(拘束)하는 분이 아니라 구속(救贖)하신 분입니다.

갈3:12~14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에게 또 하루가 허락되었어요.
매번 똑같은 시간이 주어집니다.
기회가 주어진 셈이죠.
이제 그 기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사는 것도,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드는 것도,
우리의 손에 달렸습니다.
오늘도 어제와 다르지 않은 환경이겠죠.
같은 사람을 만나고, 같은 장소를 드나들 겁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하루아침에 환경이나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도 오늘이 어제와 다른 것은,
환경이나 상황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그저 습관적이 아닌 기대감으로 시간을 대하고,
이미 결과를 안다는 듯한 절망이 아닌
소망을 품은 내가 달라졌기에 오늘은 새로운 것입니다.
내가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집니다.
그렇게 어제와 다른 오늘이기를 빕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교회에는 찬양의 붐이 일었습니다.
이때 찬양팀들이 각 교회에 조직되고,
예배시간에 찬양팀들이 등장하고,
더 나아가 따로 찬양으로만 이루어진 예배들이 만들어졌죠.
화요집회다 목요찬양 예배다 하는 것들이 시작된 시점이 그때입니다.

이 찬양 집회를 선도했던 교회와 그룹이 있었어요.
목요찬양 집회라는 말을 만들어낸 이들이 그들입니다.
한 번은 그 교회에서 세미나를 했어요.
찬양에 관한 여러 가지 신학적, 목회적 노하우를 전하는 세미나였죠.
많은 교회 관계자들이 참여했고, 저도 그 자리에 함께 했드랬습니다.
매우 유익하고 의미 있는 모임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이제 Q&A 시간이 마련되었습니다.
참여자들의 궁금한 것들을 듣고 답변해 주는 시간이었죠.
그런데 질문의 대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질문의 90% 이상이,
마이크는 무엇을 쓰는지, 음향 시스템은 어떻게 구하는지 등이었어요.
세미나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찬양의 중요성,
찬양을 통한 성장과 성숙의 과정들에 대한 질문은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비단 이 사례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이 듣는 이에 의해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되기도 하고,
어떤 현상이 보는 이에 따라 왜곡되기도 하죠.
한마디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도, 해석도 달라집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죠.
"율법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일로 살 것이다"
이는 율법을 중요시하면 율법이 늘 따라다닌다는 뜻입니다.
가령 이런 경우가 있죠?
꼭 이사는 어떤 특정한 날에 가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에게는 마치 철칙처럼 이를 중요하게 여기죠.
4자라고 죽어라 싫어하는 분들이 계셔요.
죽을 사(死) 자라고 엘리베이터에도 적어놓지 않죠.
이름을 빨간 글씨로 쓰는 사람들도 없어요.
예의가 아니라나요?
그것을 믿는 이들은 희한하게도 그런 터무니없는 미신에 얽매이죠.

어쩌면 율법이 그런지도 몰라요.
그 율법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의 그늘에서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면서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설명을 한 단어로 요약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속량’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단어죠.
본래의 뜻은 몸값을 받고 노예를 풀어줘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일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어딘가에 묶였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풀어주셨다는 의미죠.
마치 나무에 달린 것은 저주라고 여겼던 것을,
나무에 달리셔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으로 바꾸시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묶이고 얽매였던 인식을 풀어주시듯 말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무엇인가 강박을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분은 오히려 우리를 풀어주시고 자유케 하시는 분이에요.
당신 스스로 모든 짐을 지시고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분입니다.
그러니 묶이는 구속(拘束)의 자리로 가지 마세요.
자유롭고 해방된 구속(救贖)의 자리에 서세요.
믿음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주님은 나를 묶으시는 분이 아니라 풀어주시는 분이에요.
그분은 속박의 예배가 아니라
자유한 우리의 자발적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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