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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28 - 행동이 마음의 표현은 될 수 있어도 마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갈3:5~7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
한동안 비바람 소리와 천둥번개로 덮였던
새벽 창밖의 어둠은
오늘따라 캄캄함만큼 고요합니다.
왠지 평온함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이 평온함이 새벽을 열고, 오늘에 이르길 빕니다.
사랑하는 모든 분의 마음에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의 반복처럼 느껴집니다.
성령을 받은 출처에 대한 질문을 
바울은 거듭하죠.
바울에게서 강한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언급하는데요.
믿음의 조상이자 유대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도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죠.
율법을 통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토록 쉽사리 율법에 매몰되었을까요?
왜 할례에 집착하고,
왜 율법의 행위에 빠져들었을까요?
이는 당시의 상황을 경험하지 못한 저로서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율법의 사회적 지배력과 기독교의 특수한 전파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없기에
섣부른 판단을 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생각해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예가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예로,
많은 분이 목사인 저를 돕고 싶어 합니다.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어 하시고, 
제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고 싶어 하시죠.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로 저는 사랑받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리 가족들에게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없어요.
그분들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범사에 잘되고, 영혼이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리스도인으로 아름답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바람은 이뿐이에요.
제가 목회를 하는 이유도 이뿐입니다.
다른 꿈이 없어요.
조금 더 신앙생활을 함께하는 목사로서의 바람을 첨가하자면,
매일 조금씩이라고 꾸준히 말씀 묵상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고,
늘 감사노트를 적는 것처럼 감사의 고백을 현실화하면 좋겠어요.
다른 바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바람을 다들 아시는데 잘 못 하세요.
왜냐하면 그것은 잘 안 보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워지기도 하고,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 하찮아 보이기도 하죠.
그러다 보면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을 하고 싶어집니다.
표시 나는 일, 눈에 보이는 일에 집착하게 되는 거죠.
마음으로 사랑을 품는 것보다
밥 한 끼 사주는 것이 훨씬 큰 표현처럼 보이죠.

저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말씀묵상을 한다면 그것은 입으로 시인되어야 하고,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생활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사랑한다면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행동으로도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행동이 마음의 표현은 될 수 있어도,
그 마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보이는 일보다 어려워요.
나 스스로 정해야 하고, 아무도 없을 때도 행해야 하죠.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금 잘하고 있는지,
끊임없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질문도 많아지고, 갈등도 생기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게다가 갈라디아 교회에 선생이었던 바울도 없잖아요?
그러니 그런 어려움은 가중되었을 거예요.
그때 거짓 교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말하죠.
“할례 받는 것이 믿음의 표증이다.”
이게 얼마나 반가운 소리입니까?
나의 믿음이 어떠한지,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인 참에
할례라는 행위가 내 믿음의 기준이 되니 얼마나 시원했겠어요?

이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어떤 행동으로 나를 대신하려 하는 경향이 있죠.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는 늘 어렵습니다.
묵상을 하려고 하면 바쁜 일이 생기고,
기도해야 함을 알지만 정작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리죠.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교회 한 번 나가면 교인이 된다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단기선교 한번 가면, 선교적 신앙이라고 하니 얼마나 좋아요?
그렇게 행위 하나로 퉁치고 나의 신앙 분량을 정할 수 있으니
얼마나 반갑고 고맙습니까?
그렇게 되면서 우리는 매일 주님과의 예배를 안 해도 되고,
평소 선교적 사명을 갖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으니 얼마나 기뻐요?

언젠가 독일 교회를 탐방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안내를 해 주시던 목사님이
고딕 양식의 멋진 교회 건물을 보여주었습니다.
충격적인 말과 함께요.
저 멋진 교회 건물이 단돈 1불에 술집에 팔렸다는 이야기였어요.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주일에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 모이는 이들이 없었다는 겁니다.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독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묻는 제 질문에
그 목사님은 이런 대답을 내놓으셨어요.
“독일인들은 종교세를 냅니다.
헌금을 세금으로 내는 거죠.
누구나 빠짐없이 냅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줄 알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행동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율법 또한 믿음의 표현이에요.
사랑하면 손이 가는 것이고, 발길이 닿습니다.
간절히 바라면 가만히 있지 않아요.
그것이 당연한 마음의 이치입니다.
그렇다고 그 행동이 마음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
봉사한다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교회에 다닌다고 다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할렐루야!를 외친다고 다 찬양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 마음의 작은 불꽃을 보시죠.
렙돈 두 닢에 담긴 가난한 과부의 작은 믿음,
벼랑 끝에 선 사르밧 여인의 작은 순종,
한 생명을 위해 엎드린 백부장의 작은 낮아짐,
그 작은 마음의 불꽃을 주님께 드리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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