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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23 - 너나 잘하세요.



갈2:11~14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안위하심이 모든 가족들 위에 함께하시길 빕니다.

어제의 본문과 오늘의 본문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이전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의 일이지만
이제는 장면이 바뀌어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의 일입니다.
안디옥은 바울과 바나바가 사역하는 곳이죠.
베드로가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였던 만큼
그가 만나는 이들은 이방인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마 그날도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원어의 시제로 보아 그 식사는 한 번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번의 식사 가운데 그날이었던 거죠.

그 자리에는 바울과 바나바도 함께 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식사 도중에 한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왔다는 소식이었죠.
그들은 야고보가 보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확인이 필요할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이었던것 같다는 거예요.
그들이 누군지 알 수는 없으나 베드로가 소식을 듣고 
반응을 할 정도라면 알만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소위 유대적 사고방식의 그리스도인들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들에게는 이방인과의 교제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겁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마치 오늘날 타 종교인들과 교제하는 것처럼 보였을 거예요.
어쩌면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베드로는 그 자리를 피했던 모양입니다.
덩달아 바나바 또한 그랬던 모양이에요.
이를 두고 바울이 그들을 책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죠.

오늘 본문의 사정은 위와 같습니다.
얼핏 봐도 베드로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좀 가식적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한 듯하죠.
그런데 저는 베드로와 바나바를 조금 변호하고 싶습니다.
바울이 위선자라고 몰아붙일 만큼 이 일이 큰 일일까 싶어요.
왜냐하면 충분히 베드로나 바나바도 오해를 줄이고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너무 좋게 보는 걸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드러나는 바울의 과한 표현을 보면 또한 다른 이해도 가능합니다.
바울이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는 목적을 생각해보면 말이죠.
그는 격하게 자신의 권위에 대해 항변하고 있죠.
그래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의 협력도 이야기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는 그들을 책망하기까지 하는 권위를 드러내죠.
그런 면에서 보면 바울이 조금 오버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 제 느낌입니다.
나무랐다거나 위선이라는 표현은 마치 하대하는 듯한 모습까지 연출하죠.

오히려 저는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드로를 비난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더 높이려는 것보다,
베드로와 바나바를 빗대어 정작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것은, 14절의 말입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이는 마치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시는 말처럼요.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고 비그리스도인처럼 살면서 어찌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수많은 잣대와 판단을 동원하여 정죄를 일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래야 그리스도인이고, 저래야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정죄하고 편 가르는 이들이 있어요.
교회 출석을 기준으로 죄인과 의인을 가르고,
심지어 같은 복음 안에 있는 이들조차 특정한 사상과 교리를 강요하며 가짜라고 치부하는 행동들을 하는 이들이 있죠.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그리스도인의 권리는 정죄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죠?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셨습니다.
주님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셨다면
우리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죄가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셨어요.
여전히 삐딱하고, 여전히 암울한 우리들이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여전히 기대하시고 기다리시며 사랑하시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면 가져야 할 것은 이것뿐입니다.

복음은 사법적 도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정죄의 기준도 아닙니다.
오로지 나를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하는 지팡이입니다.
남에게 들이대는 도구가 아니라 나를 향한 도구예요.
세상은 십자가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진, 바로 내가 바꾸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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