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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19 - 왜 우리는 이리도 화가 나 있을까요?


갈2:5
우리는 그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을 외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코로나 확진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소식,
그 중심에 교회와 목사와 기독교인들이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
안쓰럽고 안타까우며 속상한 어제였습니다.
그럼에도 어제의 일들로 오늘을 망칠 수는 없습니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오늘은 오늘의 언어로 주님 주신 은혜를 써 내려가길 기도합니다.

바울은 거짓 형제들로 인해 흔들리는 교회를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의해 많은 이들이 휩쓸려 가는 것을 보았죠.
그들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모두 초신자들이었기 때문이죠.
아니 어쩌면 모든 이들이 초신자들일 수밖에 없었죠.
전혀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장에 그리도 쉽게 동화되었을지도 모르죠.

그 거짓 형제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쯤으로 해석했습니다.
여기서도 선민사상이 드러난 것일까요?
유대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존재했고,
그들의 사상에 동화되고 동조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었죠.

사랑이라는 것이 이타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상대방의 자리로 들어가 주는 것이죠.
그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거짓 형제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었어요.
남에게 가주는 것보다 남을 끌어오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이 부분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길을 돌아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건너가 주는 것이지, 끌고 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가끔 어떤 사건에 대해 ‘피해자 중심’의 생각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해보지 않은 일이기에,
그 피해자의 입장에서 어떤 마음과 느낌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내 중심적으로 바라보죠.
특별히 여성과 관련된 사건 사고는 더욱 그렇습니다.
남성 중심의 시각은, 여전히 피해자를 불편하게 만들죠.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게 자기중심적인 복음, 
이기적인 입장들이 복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죠.
그리고 그것이 가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어제는 온종일 커다란 짐을 짊어진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도 없이 광장에 모였습니다.
성조기는 물론 일장기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날은 광복절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광복절이지만 일본에게는 패전일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다수는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극단적인 이들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인들을 대표할 수도 없을지 몰라요.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도, 
또한 그 자리에 없었던 이들조차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공통점으로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모두 무엇인가 대체로 화가 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리 화가 났을까요?
정부가 잘 못해서요?
이런 사회가 정의롭지 못해서요?
가치판단은 각자의 몫이니 그것을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또한 정치적인 분별을 할 생각도 없습니다.
정부가 잘 못 한다고 느낄 수 있어요.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뭔가 안타깝고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죠.
그렇다고 다 화가 난 상태가 되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대중의 화를 이용하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혐한 감정을 자극하여 한국을 향한 화를 돋우는 것처럼,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유익을 도모한 사례는 많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기독교가 그런 장난질에 놀아나게 되었을까요?

혹시 그것은 나의 뜻대로, 나의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는 아닐까요?
남에게 공감해주기보다 나의 주장에 더 익숙해서는 아닐까요?
사회를 감싸 안고, 연약한 이웃을 용납하기보다,
자신의 잣대로 정죄와 단죄를 일삼기 때문은 아닐까요?

너무 아프고 답답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대합니다.
나도 모르게 바울의 답답함이 순식간에 나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화가 또한 그리스도인의 결론은 아니죠.
우리는 아프고 답답한 상황을 인내하고 기다리며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존재들이니까요.
또한 자신의 주장과 익숙함을 내려놓고,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며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니까요.
그것이 우리의 죄를 죄로 정죄하시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십자가로 태우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니까요.

우리는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바울이 굴복하지 않듯, 
우리 또한 사랑을 대신하는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인만의 것이 아닙니다.
인류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의인뿐만 아니라 죄인들에게까지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공감하고 함께하는 자격만 있을 뿐입니다.
마치 흙이 쓰레기를 품고 자신도 썩어가듯이,
그러나 마침내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회복 시켜 가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정죄하는 데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고 사랑하는 데서 빛납니다.

공감을 잃은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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