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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14 - 그리스도인의 권세는 변화에서 나옵니다.


갈1:18~20   
삼 년 뒤에 나는 게바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말은, 하나님 앞에 맹세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의 창밖은 칠흑 같네요.
빛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암흑입니다.
그런데 이 어둠은 곧 사라지겠죠?
아침이 오니까요.
많은 비에 태풍까지 덮친 피해는
아마도 이 칠흑 같은 악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아침이 옵니다.
밤이 깊을수록,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더 가까이 오는 법이니까요.
아픔과 고통의 한가운데서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는 
오늘을 살기 원합니다.

아라비아에서 3년을 지난 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죠.
베드로는 물론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당시 초대교회 중요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바울에게 깊은 확인의 과정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만난 예수님,
그리고 아라비아에서 가졌던 깊은 성찰의 시간 속에서 
확고해졌을 그리스도의 의미를 확인해 보는 과정이었을 거예요.

사실, 바울이 베드로와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데요.
맹세까지 동원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강조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왜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해야만 했을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서? 말이죠.
그래서 다른 번역본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심지어 헬라어 원문도 읽어 보았어요.
그리고는 작은 힌트를 얻었습니다.
물론 저는 언어 연구자가 아닙니다.
헬라어의 능통자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해석이 정확하다고 말씀드릴 수도 없어요.
다만 저는 이럴 수도 있겠다 정도의 해석을 할 뿐입니다.

19절에 처음 등장하는 헬라어 단어는 
[헤테론]입니다.
이것은 ‘다른’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보통 뿌리가 다르다는 뜻을 내포하죠.
그다음으로 등장하는 [아포스톨론]은 ‘사도들’을 뜻합니다.
이를 일반적으로 ‘사도들’을 주격으로 놓고 해석하면,
'다른 사도들'이 되지만,
‘사도들’을 소유격으로 놓고 해석하면,
사도들의 ‘다른 것’이 되죠.
어쩌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베드로나 야고보를 만나본 결과,
그들과 자신의 복음이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사도권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제자 출신의 사도들과 다르지 않은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었을 테죠.

이것은 제 개인적인 해석이고요.
그렇다면 우리가 읽은 새번역의 해석대로라면 어떨까요?
바울이 베드로와 야고보 이외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이미 설명이 필요 없는 제자입니다.
반면 야고보는 설명이 필요해요.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도,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아니죠.
그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어요.
오히려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하는 가족이었죠.
그러던 그가 예루살렘 교회를 책임지는 지도자가 됩니다.

베드로는 어떤가요?
예수의 수제자였지만 배신자의 전형이 되기도 하죠.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3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죠.
그렇게 베드로는 출렁이는 변화를 겪으며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3이라는 숫자가 참 재미있어요.
18절, 첫 단어도 3이라는 숫자죠.
히브리어로는 이 단어가 [샬라쉬]인데요.
이는 반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 차례 반복해서 더욱 강화시킨다는 의미인 거죠.
여기에 햇수를 나타내는 단어 [샤네]는,
‘바꾸다’, ‘변화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어쩌면 이 말은,
아라비아의 3년 동안 자신은 큰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베드로의 변화처럼,
그리고 야고보의 변화처럼 말입니다.

오늘 히브리어 헬라어를 많이 사용해서 죄송합니다.
전문가도 아닌데 아는 척해서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오늘 바울의 변증을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어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권세는 변화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어느 출신, 어느 계층, 어느 가문 등,
타고나거나 정해진 자리가 아니라,
새롭게 변하고, 거듭나는 데서 십자가의 권세가 있다는 사실 말이죠.
마치 베드로가 변했던 것처럼,
마치 야고보가 변했던 것처럼,
변화된 바울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여요.

사랑하는 여러분,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이 진리를 찾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자만이 은혜를 누려요.
찾는 자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셨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지금 자리에 만족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주신 것보다 주실 것이 더 많으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분이고,
두드리는 이에게 열어주시는 분이셔요.
과거를 이기는 방법은 변화하는 것이고,
옛사람에서 탈피하는 방법은 새사람이 되는 것뿐이에요.
그렇게 변화는 진리를 찾는 과정입니다.

오늘도 새롭게 사세요.
어제와 다른 나로 사세요.
새로운 도전을 하세요.
변화가 가장 큰 능력이고 간증이 됩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이 우리를 새로이 만듭니다.

나의 성격?

나의 처지?

나의 환경?

거기에 나의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

그것에 나의 권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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