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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13 - 정해진 길 따위는 없습니다.


갈1:16b~17   
그 때에 나는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갔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폭우와 비바람도 이 아침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의 상처가
제아무리 깊어도 이 아침을 막을 수는 없어요.
그렇게 우리의 아픔은 
또 다른 강한 의지와 다짐이 되어
새로운 아침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을 믿습니다.
도울 길 없는 작은 마음이지만
매일 아침,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픔에 작은 눈물의 기도로 함께하고 싶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 전후 사정을 상세히 기록 중입니다.
아마도 갈라디아 지역에서 전도할 당시
자신의 이야기를 상세히 할 방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네요.
복음을 전하기도 바쁜 와중에
자신의 간증을 전할 시간도, 상황도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런 그가, 
자신의 과거를 들추며 메시지를 폄훼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오늘 본문에 기록된 그의 행적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유대교의 행동대장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그는,
다마스쿠스로 향합니다.
성경상에 다메섹으로 잘 알려진 그곳은 
지금의 시리아 수도입니다.
당시 분명 유대의 영토는 아니었지만
로마의 같은 식민지로,
유대 지역을 벗어난 유대인들이 다수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여요.
그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곳으로 향하던 길에서 회심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길로 아라비아로 떠납니다.
아라비아라는 곳이 특이합니다.
쉽게 사우디 아라비아의 그 아라비아가 떠오르죠.
그런데 특정해서 바울이 머문 곳이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갈라디아서에는 1장 이외 4장에도 아라비아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그때 지목된 곳이 시내산이었어요.
시내산 또한 특정되지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 지역으로 인식하는 바
바울이 머문 곳이 그 지역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현재도 아라비아 지역은 사막으로 유명하죠.
당시는 더욱 메마른 사막으로 덮인 광야였을 테죠.
그러니까 바울은 광야에서 
회심한 이후의 처음 시간을 보낸 셈이죠.
어쩌면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했던 것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바울이 예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그 기점을 광야에서 시작했다면
출애굽의 과정을 통해 옛 노예 생활을 버리고 가나안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이끄심과 기막히게 오버랩이 되네요.

이런 오버랩은 또 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이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도 명확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바울의 연도나 기간들을 특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마다 해석이 다르죠.
다만 일반적으로 아라비아에 3년 동안 머물렀다고 
대부분의 사람이 주장합니다.
이는 아마도 3년 후, 예루살렘을 방문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저는 이 3년이라고 주장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뭘까요?
마치 예수님과 공생애를 같이 했던 제자들의 시간이 3년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이런 오버랩이 작위적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모습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읽게 됩니다.

많은 사람은 ‘정상적인 방법’ ‘모두가 인정하는 방법’을 선호해요.
옳은 길에도 어떤 방법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죠.
그리고 그런 모두가 공감하는 방법을 편하게 받아들입니다.
그 방법을 벗어난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죠.
마치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무슨 지식이라고는 전무한 무식한 사람 취급하듯,
아니 심지어 사람 구실도 못하는양 생각하죠.
독학으로 무엇을 배우고, 삶에서 얻은 지식과 지혜는 인정을 잘 안 합니다.
공신력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무슨 정통의 신학을 공부해야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것처럼 여기죠.
물론 목회자는 그럴 수 있습니다.
목사 안수라는 것이 교단의 특정한 라이선스이니까요.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영적인 지식이 없는 것처럼 여기고,
매일 묵상을 통해 얻은 지혜는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당하죠.
마치 영성에도 무슨 정해진 길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정해진 길 따위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이 정해진 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보여주죠.
예수님과 공생애를 같이 한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그 길만 사도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시죠.
그분은 태초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실 분이시기에
모든 세대, 모든 이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날도 그분을 통해 회심하고 주님 앞에 서는 이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귀한 사도들이 됩니다.
아라비아에서도 주님은 만나주시고 함께해 주세요.
그렇게 나를 인도하시죠.

사랑하는 여러분,
옳은 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정해진 길은 없어요.
주님이 지금 함께하시면 그 길이 옳은 길입니다.
다른 사람하고 조금 달라도,
다른 이들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려도,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늦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그 길이 나의 길입니다.
그러니 비교하며 살지 마세요.
정해진 코스, 정해진 길은 없어요.
그러니 광야라도 주님이 함께하시는 길을 가세요.

오늘도 하나님은 나의 하루를 주셨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특별한 하루입니다.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무슨 이득이 없어도,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
주님이 함께하시는 하루,
그날이 특별한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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