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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08 -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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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1: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오늘은 어제와 똑같을지 몰라요.
그러나 오늘의 시간은 어제와 다르고,
새롭습니다.
오늘 아침이 좋은 이유는,
어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오늘이 어제와 같다면,
우리는 익숙한 방법으로,
또 늘상 그래 왔듯이 오늘을 대하겠죠.
별 기대도 없이, 별 두근거림도 없이…
그러나 분명 오늘은 어제와 다릅니다.
우리에게 새로 주시는 시간이니까요.
그러니 어제까지 우리가 하지 못했다면,
오늘은 다르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시간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소망에 근거합니다.
다르지 않다면 이미 새로운 것이 될 수 없으니까요.
오늘은 어제와 다른,
새로운 시간을 사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개척,
새로운 모험,
새로운 도전의 하루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몇 가지 사실들을
유추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바울은 소위 ‘다른 복음’의 전달자들이
갈라디아의 첫 그리스도인들을 흔들었던 이유의 단면을 밝힙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까지는 아니어도
그들의 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일이었다고 말이죠.

더 재미난 대목은 바울이,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원문의 뉘앙스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힘듭니다만,
이 말은 이전에 바울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니까 그가 유대교의 신봉자로 살았을 때
그의 열심의 기초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데 있었다는 고백이 되는 셈이죠.
만약 그런 어법이 맞다면,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에서 활동하던 거짓 교사들이
자신의 과거 전철을 밟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사람의 환심을 산다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의 구분이 드러납니다.
단순히 말하면,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다수의 인기와 박수에 맞춰 자신의 가치관을 세우는 이들에 대한 지적이지만,
이를 유대 율법을 전하던 자신의 과거를
사람의 환심을 사는 일로 규정한다면 차원이 달라집니다.
그것은 유대 전통에 얽매여 그리스도를 해석하려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마치 어제를 통해 오늘을 해석한다면
우리에게 오늘은 전혀 새로울 수 없듯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신 일만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세상,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였습니다.
전혀 다른 가치관,
전혀 다른 세계관의 깃발을 우리 가슴에 꽂으셨으니까요.
강함이 지배하는 세상에
약함의 능력을 보여주셨고,
섬김 받는 자가 성공한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성공한 자임을 보여 주셨어요.
높은 곳을 쳐다보며 사는 것이 당연했던 우리에게,
낮은 곳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려 주셨으니까요.

사람들은 과거에 익숙합니다.
자신의 익숙함에 끌리죠.
그래서 과거를 버리기 힘들어하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려고 합니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고,
새롭게 바뀌는 것을 거부하죠.
이것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렇게도 쉽게 무너졌던 증거입니다.
자꾸 익숙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작용에
그 거짓 교사들이 불을 질렀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익숙함에 갇혀 살지 마세요.
주어진 새로운 시간을 과거 그저 그랬던 시간 취급하지 마세요.
그런 나의 경험은 새로운 모험의 길을 막고,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도 막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내가 과거에 머물고, 나의 경험에 머무는 한
우리의 현실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익숙하면 할수록,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내가 있습니다.
내 좁은 시각으로 하나님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에 나를 담아야 합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다루시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어떤 제사나 행동이 아닙니다.
나의 좁은 과거의 익숙함을 깨고,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새로운 창조의 시간을 과거의 율법에서 찾았습니다.
새로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경험과 시각에서 해석하려 했고,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주어진 좁디좁은 울타리인 율법에 그를 가두려 했어요.
우리의 그릇으로는 담지 못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그릇에 담아 쥐락펴락 하려 했던 것이죠.

한계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분의 행동, 말 한마디조차 해석할 힘이 없어요.
내가 경험한 것으로는 그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분을 보려면 나의 한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나에게서 나와 그분에게도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에 내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죠.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를 통해 펼치실 하나님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의 경험으로는, 나의 익숙한 한계로는 이미 끝난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아직도 무궁합니다.
이 땅의 시간이 모자라다면,
천국의 시간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나를 나답게 높이실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 소망이죠.
그러니 나의 익숙함으로 나를 해석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나를 나의 한계에 가두지 마세요.
어디까지인지 모를,
무궁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사세요.

나의 경험에 맞춰 오늘도 뻔한 하루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새로 주신 하루는 어제의 하루가 아니니까요.
거침없고 한계가 없는 하루를 누리세요.
나의 믿음대로, 
내가 꿈꾸는 대로,
내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질,
내 작은 품이 아닌, 하나님의 품에서 노니는 하루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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