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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07 -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로입니다.(갈1:7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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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7b~9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좋다는 말을 사용하기에 
마음이 한편 무겁습니다.
많은 비로 인해서 이곳저곳에
극심한 피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오늘 이 아침에도
누군가는 편안한 눈뜸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마음이 아프고,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침에 조심스레 깊은 안부를 전하고 싶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침이기를 빌고,
일어서는 아침이길 빕니다.
절망에서는 새로운 길이 없습니다.
오늘을 새롭게, 
좋은 시작의 출발만이 우리를 서게 하죠.
그래서 다시 한번,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어떤 무거움이 우리를 짓누를지라도,
오늘 이 아침은 좋은 아침이길 
간절히 빕니다.


한때 바울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었던,
갈라디아의 교인들이 한순간 무너지는 것을
넋 놓고 보아야 했던 바울은,
아마도 무엇이 그들을 그리 삽시간에 쓰러지게 만들었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쌓는 것은 어려워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으니까요.
앞으로 전진하는 데는 매일매일의 수고가 필요하지만,
옛사람으로의 귀속은
마치 고무줄로 끌어 잡아당기듯 순간입니다.
그것도, 나도 모르게 말이죠.

그의 결론은 한 곳으로 모아졌습니다.
바로 갈라디아 교회 주변에 모여든,
일명 교사들, 혹은 선생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죠.
어떤 교사들은 유대의 율법을 가르치는 데 급급했고,
어떤 교사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득에 따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사들은 돈벌이에 매달리기도 했죠.

그들이 어떤 다른 복음을 전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바울이 가르친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의 가르침에는 
사랑이나 일치, 조화와 하나 됨은 없었습니다.
도리어 편 가름과 시기, 질투, 경쟁과 나뉨이 있을 뿐이었죠.
그 일로 교회 공동체는 많은 부침이 있었고,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바울은 단호했어요.
평상시 잘 사용치 않았던 단어를 씁니다.
바로, ‘저주’라는 말입니다. 
 
결코 사인 간에 잘 쓰지 않는,
아니 금기시되어 있는 저주라는 말을 서슴없이 
바울이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주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원리에는 
우리가 곧잘 잊어버리는 중요한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이 땅을
우리에게 맡기셨어요.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힘에 의한 지배적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그 명령은 강압이 아닌 설득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고 알리는 것으로서의
다스림이었어요.
그래서 이를 두고, 몇몇 학자들은
하나님의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이라는 말을 

이 본문에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손으로 이 땅을 창조하시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우리에게 그 나라의 완성을 맡기셨던 것이죠.
그 일이 바로, 대대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고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통로’로 삼으신 것이죠.
우리 인간을 만드신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이 ‘통로’삼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모든 부모가 그 통로의 역할을 했습니다.
가르치고 보여주는 일들을 부모가 했죠.
신약에 넘어와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말씀의 통로가 되도록 부탁하시죠.
왜냐하면 우리의 지음 받은 목적이 ‘통로’였으니까요.

시대적인 배경과 바울의 특수성이 분명 존재하지만
신약의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죄가,
바로 거짓 교사에 관한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단호하고,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남을 현혹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남을 실족하게 하는 자는 죽을죄라고까지 하죠.

오늘날에도 가장 위험한 것이
가짜 뉴스이고, 잘못된 정보입니다.
가짜 뉴스 하나가 한 생명을 완전히 짓밟을 수 있음을
우리는 수시로 목격하고,
펜으로, 방송으로, 한치 혀로 없는 일이 있는 일로,
반대로 있는 일이 없던 것으로도 변모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통로입니다.
내가 인정하든 안 하든,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는 교사가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메신저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통로로 지음 받았으니까요.
그 통로는 특정한 이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임무이고 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은 좋은 통로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표정과 행동, 삶은 좋은 정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좋은 교사로 우리가 서기를 바라시죠.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전달자요 통로로 살게 될 것입니다.
과연 무엇을 전하게 될까요?
나를 통해 어떤 메시지가 전달될까요?
나는 어떤 통로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좋은 마음으로 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기분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사명인 이유는,
우리가 바로 통로이기 때문이에요.

거짓 교사들을 조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잘못된 정보를 듣지 않는 것도 중요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거짓 교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도 모르게 말입니다.
의도하지 않는 거짓 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늘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복음이 나를 늘 주장케 해야 합니다.

오늘도, 
아름다운 통로로 사는 여러분들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축복합니다.
귀한 통로가 되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흐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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