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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03 - 기쁨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갈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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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번역성경
3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가 열립니다.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밤이 가고 해가 밝았어요.
이 아침에 이 사실이 감사로 다가옵니다.
죄가 있든 없든, 
불의하든 정의롭든,
나의 감정과 상태가 어떤 상황이든,
우리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처럼 오늘이 감사합니다.
값없이 얻은 은혜처럼 
우리, 오늘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정한 인사법이 있습니다.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것이 그것입니다.
그의 편지에는 예외 없이 이 인사가 등장하죠.
단순히 인사치레라고 하기에는
마치 무슨 주문처럼 그는 이 인사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사실, 이 인사는 동의어 반복입니다.
은혜와 평화가 같은 의미의 말이라는 뜻이죠.
정확히 말하면 뜻이 같다기보다 사용법이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은혜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카리스]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이 말을 매우 많이 썼어요.
왜냐하면 이 말이,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혹은 ‘건강하길 빕니다.’라는 뜻으로
주로 인사말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평화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이레네]인데요.
이 말은 히브리어로 말하면 [샬롬]이에요.
다 아시다시피
샬롬은 전형적인 유대식 인사말이죠.
그러니까 바울은 인사를 두 번 한 셈입니다.
혹시, 초대교회에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사도 바울의 이 인사법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말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반복적으로 쓰는 이 인사말,
은혜와 평강은,
결코 습관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늘 하는 말이었던 이 인사말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당시 초대교인들에게 외쳤던 것 같아요.

카리스의 원형이 되는 단어는 [카리오]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기뻐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가지고 있죠.
이 때문에 파생된 [카리스마]는 ‘선물’이 되고,
[유카리스테오]는 ‘감사’가 됩니다.
여기에 바울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했습니다.
우리의 공로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노력과도 무관하게,
오로지 하나님의 의지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십자가로, 구원으로 이어졌음을 기억하고 기뻐하라는 뜻이죠.

돌아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아팠던 일, 
어려웠던 순간,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시절,
지나고 보니 다 은혜입니다.
어느 때는,
'이러려고 그러셨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왜 그때는 감사와 기쁨이 없었을까요?
아니 오히려 왜 절망하고 낙심하며
불평을 쏟아냈을까요?

사실, 우리의 욕심을 만족케 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들을 웃게 할 영원한 것은 없어요.
만족도 한순간이고,
기쁨도 잠깐입니다.
그리곤 이내 익숙해지고,
더 큰 욕심에 가려 그 짧았던 것조차 사라지죠.

본래 그렇습니다.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샘솟는 기쁨이라고 하죠?
기쁨은 만드는 것이고, 지키는 것입니다.
마치 작곡가가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하듯이,

아비가 새끼를 지키듯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생성해 내야 하는 것이 기쁨이에요.

어떤 상황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기쁨을 가지고 상황을 바라보기에 기쁠 뿐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저도 이 아침에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기뻐하세요. 아니, 기쁨을 창조하세요. 매일."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메마르고 피폐함 속에서 기쁨의 샘을 만드세요.

사막에 길을 만들듯, 기쁨을 창조하세요.

그렇게 항상 기뻐하세요.

아침마다 내 영혼에게도 인사해 보세요.
'기뻐하라 내 영혼아!'

오늘도 우리 모두가
기쁨의 꽃을 피우고,

기쁨의 샘을 기르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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