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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09 - 나에게 찾아오신 복음대로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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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1:11~12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밝혀드립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바울의 글을 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의 높은 학식과 철학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어려운 글을 쓴다는 것은 허구니까요.
오히려 앎은 간단명료하고 선명합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바울은 유대교 신봉자 시절이 훨씬 명료한 글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런 명료함은 또한 독단적인 아집에 사로잡히기도 하죠.

우리가 그의 글을 대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는 그의 글들이,
그에게는 카오스, 즉 재난적인 상황에서 나온 글들이라는 점이죠.
왜냐하면 그는 지금 엄청난 혼돈의 세계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목숨과도 같았던 신념을 벗어버리고,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에 휩싸였을 테니까요.
자신을 지탱하던 모든 철학이 괴멸되고,
새로운 영적 질서가 재창조되는 시기에,
그는 우리에게 글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하루아침에 생각을 교정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예전처럼 충분한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새로운 신앙은 골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이죠.
그는 바빴습니다.
주님의 생각과 음성을 듣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그 말을 전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죠.
하루의 묵상이 또 다른 이들에게 메시지가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철학의 완성을 논하는 것조차 사치였어요.
그는 자신의 결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는 매일매일, 하루하루,
마치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이처럼,
매 순간 하나님의 긴밀한 인도 하심이 없이는 가르치지 못하는 그런 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바울은 다른 의도를 가질 수 없었을 거예요.
자신도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몰랐을 테니까요.
이는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떠드는 메신저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을 통로로 자신이 세워지고 지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급하고 격하게 갈라디아서 편지를 시작했던 바울은,
조금이나마 마음을 가라앉히고 
11절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10절의 메시지를 재차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의 생각이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이 말은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는 듯해요.

먼저는, 의심받는 사도권,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 출신도 아닌 자신이
사도로서 부름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하는 주장에 대한 항변입니다.
또한 복음이 어떤 전통적인 사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도 밝히죠.
유달리 유대교는 분파가 많았습니다.
작은 차이의 교리를 가지고도 서로가 진리임을 주장하는 일들이 많았죠.
어쩌면 지금 초대교회는 시작과 동시에 그런 교리적 싸움에 물들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바울은 이것이 어떤 전통의 배움도,
또한 어떤 분파의 가르침도 아님을 말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개역성경은 ‘계시’라고 번역했는데요.
굳이 저 개인적인 단어를 사용한다면,
‘찾아오셨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원한 것도, 내가 바란 것도 아니지만,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알려 주신 거라는 뜻이죠.
그리고 그는 그 순간,
새로운 창조의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과거의 질서는 사라지고, 새로운 질서가 자신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오늘따라 말이 좀 어렵죠?
아침묵상에서 역사적 배경이나 신학적 논쟁을 다루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말초적인 나눔을 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그 많은 상황과 생각들 가운데,
과연 바울이라면 지금 어떤 메시지를 나에게 던져 줄까? 만을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생각이 간단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그런데 잘 안 되시죠?
상황은 다 다르시겠지만
잘 되지 않는 이유는, 그 하고 싶은 일만의 문제가 아닐 거예요.
곁가지들, 여러 주변 상황들, 그리고 감당해야 할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우리는 쉽게 포기합니다.
하고 싶은 일은 시작도 못 한 채 말입니다.
그런데…
그냥 그 하고 싶은 일만 생각하면 안 될까요?
그냥 하고 싶은 일 자체에 집중하면 안 되나요?

경험이 많을수록, 두려움이 많을수록,
우리는 주변의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죠.
그것도, 마치 주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기적인 것처럼 겁을 주면서 말이죠.
그렇게 우리가 포기하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다른 곁가지들 때문입니다.
그리곤 핑계를 삼죠.
나는 하고 싶었는데 세상이 도와주지 않았다고요.
너무도 비겁하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어 주셨습니까?
그럼 여러분도 위로하며 사세요.
무슨 신앙생활이 어떠니, 믿음 생활이 어떠니 가르치려 드는 
꼰대들에 휘둘리지 말고,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보여주신 대로만 살면 안 될까요?

그분이 여러분에게 기쁨 되어 주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어 주세요.
아무데서나 헤벌레 웃으면 안 된다고 충고하는 말 듣지 말고,
그냥 누군가에 웃음이 되어 주면 안 될까요?

그분이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셨나요?
그럼 그게 누구든 사랑하며 사세요.
배신당해도, 뒤통수를 맞아도, 그냥 끝까지 사랑하세요.
그냥 나에게 주신 그 사랑을 나누며 사세요.
내가 받은 복음대로 사세요.
그분이 나에게 찾아오신 대로 말입니다.

바울이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뜻이 다른 나를 위해,
길이 다른 나를 위해,
심지어 원수인 나를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
그래서 그는 자신과 다른 이방인들을 위해,
자신의 길과 다른 타인들을 위해 선교사의 삶을 용감하게 살았던 거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에게 찾아오신 복음대로만 사세요.
나에게 주신 은혜만 생각하며 사세요.
그것만이 삶의 잣대 삼고 사세요.

오늘은 처음 나를 찾아오신 그분을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왜 내가 예수 믿게 되었는지,
왜 내가 그분에게 반했는지,
그리고 그분이 주신 복음을 다시금 떠올려 보세요.
먼지 묻은 그 복음을 다시 꺼내,
오늘 새로이 재사용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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