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05 - 하나님의 사랑에는 아무런 바람이 없습니다.(갈1:4~5)

반응형


새번역성경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
5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좋은 아침입니다.
한결같은 아침이고요.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침입니다.
한결같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변함없이, 늘,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의 상태에 따라 차별하지 않게 때문이죠.
그러나 한결같다는 것이 익숙함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늘 한결같기에 무심히 지나가기도 하고,
늘 변함없기에 귀하게 여기지 않기도 합니다.

오늘이 괴로운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하루가 고달픈 것이 아니라
그 한결같은 하루를 우리가 변질시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
우리의 욕심이 함부로 생채기를 내어
합심하여 오염을 시키고도,
그리고는 세월을 탓하는지도 모르죠.

하나님이 주신 오늘을 선물로 여기고
귀하게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에 
좋은 것으로만 채워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앞으로 이야기할 내용의 종합판처럼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치 화난 것처럼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죠?
4절 말씀에서 그 감정이 느껴집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지를 4절에서 단호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다른 편지들에서는 서두에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한 문장에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 적이 없어요.
조금 급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
자신이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을 정확히 해 두려고 했던 것일까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다’고요.
다른 것은 몰라도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은 밝혀집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의 교회에서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신 것 이외 다른 메시지가 돌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사실이죠.
그러지 않고서 이렇게 급히,
그것도 단호한 문장으로 그가 글을 쓸 이유는 없었을 것 같아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
그만큼 그는 갈라디아서를 사랑했습니다.
종교개혁가였던 그가 갈라디아서를 사랑한 이유가 있겠죠? 
아마도 당시 시대가 갈라디아 교회와 흡사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통렬한 개혁을 외친 바울의 길을
자신도 따라가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갈라디아의 교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그것은 어쩌면 값없이 주신 은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라요.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공로가 없이 주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었을지도 모르죠.
이런 경우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사랑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때가 있죠.
일반적으로는 감사와 감격으로 끝이 나지만
계속되는 사랑에는 의심을 품습니다.
내가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에서부터,
내게 이런 사랑을 주는 이유가 뭘까?를 생각하게 되죠.
그렇게 값없는 사랑은 의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내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죠.
뭔가 내가 조금이라도 갚아야 할 것 같은 마음부터,
세상을 바꿔야 할 것 같은 강박의 열심까지 자랍니다.
그러면서 감사의 헌금은 어느새 세금이 되어버리고,
찬양의 전도는 어느새 믿음의 분량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자 하는 묵상은,
무슨 미션처럼 하루의 숙제가 되어버리고,
예배는 마치 하나님의 화를 돋우지 않으려는 행동이 되어버리죠.

하나님의 사랑에는 아무런 바람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를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셔서도,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셔서도 아닙니다.
그의 사랑은 그저 값없는 것입니다.
그의 구원은 그저 값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거저 주신 은혜를 마치 숙제처럼 여깁니다.
그것이 믿음인 양,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죠.
그리고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신앙과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율법화 해 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는 메시지는 대부분,
우리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죠.
그것이 마치 믿음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갈라디아의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떠나거나 교회를 떠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을 넘어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들은 다시 율법의 울타리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그 사랑을 온전히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원하고,
그리고 마음을 열어 그 사랑을 누리길 원하실 뿐이에요.
우리의 믿음은 그 사랑을 아는 것으로 족해요.
우리의 신앙은 그 사랑을 온전히 누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 사랑을 누리는 이들,
그 구원을 누리는 이들이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열심보다 주님 품에 안기는 여러분 되세요.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그분의 품에 거하는 이들이 흔들리지 않아요.

오늘도 주님은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그분의 손은 여러분 위아래, 좌우에 거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머리털 하나까지 세실 만큼 여러분을 아끼십니다.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누리세요.
그저 아무 바람 없이 주시는 그분의 구원을 믿으세요.
그것이 가장 강한 믿음이고, 가장 선한 열심입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