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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18 - 우리가 전하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갈2:2~4
내가 거기에 올라간 것은 계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설명하고, 유명한 사람들에게는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달리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달린 일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지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 때문에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끼어든 자들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례 없는 코로나바이러스에, 기나긴 폭우, 이제 폭염까지
우리의 삶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몰아치지만
그래도 이 아침은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새로이 써 내려가기 위해 준비된 새로운 아침이니까요.
비록 하루를 지내고 돌아보며 
또다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할지라도
이 아침은 실패를 예단하기보다
더 좋은 가능성을 기대하는 하루로 시작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가 새로운 시간을 경험하기 힘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맞는 새로운 아침은 이전에 한 번도 없었던 전혀 새로운 시간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미 경험이라는 선입견이 이 새로운 하루를 미리 규정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죠.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하나요?
내가 아무리 새롭게 이 아침을 맞아들이려고 해도
이미 나를 싸고 있는 사고들이 이 아침을 새롭게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죠.
어쩌면 우리 귓속에서는 늘
속삭이는 음성이 있는지도 몰라요.
옛 나쁜 기억들이 분노에 차서 삿대질을 하며
새로운 시간에 비난과 낙담의 저주를 퍼붓는지도 몰라요.
아마도 이 아침에 아무런 생각도, 용기도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 들리지 않는 저주의 목소리에 싸여
어느덧 나도 모르게 이 아침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사람을 털고 일어나는 용기가 필요해요.
그래서 아침에 새로운 생각과 감정과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바울의 복음과도 연결됩니다.
바울은 이전에 유대교의 전통이 하나님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죠.
할례로 대변되는 그 전통을 갖지 않은 이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가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였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하나님은 교리가 아니라 사랑이시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자발적으로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방인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늘어나고,
유대를 넘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들,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일들이 이래저래 일어났기 때문이죠.
그중의 하나가 할례 논쟁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낸다고,
유대교의 전통들을 따라야 그리스도인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바울은 그의 제자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찾습니다.
그는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었거든요.
그리고 그는 그에게 할례나 어떤 유대 전통을 강요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율법도, 어떤 교리도, 어떤 행동으로도 제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철학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오직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거기에 긍휼도, 자비도, 용서와 용납도, 나눔과 섬김도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심스러운 말 입니다만
요즘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초대교회의 율법적 정체성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행동, 자신들의 철학을 강요하고
규칙과 법칙, 심지어 율법적 교리들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려 하는 경향들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어떤 절기나 형식을 지켜야 하고,
세례나 성찬들의 규범을 마치 절대적 기준처럼 여기기도 하죠.
구원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심지어 기도문을 외우거나 어떤 주문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모두 중요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문화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다면 말이죠.
그러나 아무리 중요한 교리나 철학일지라도
그것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은 아니시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교리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어떤 행동 양식도 아니에요.
오직 우리가 전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몇 명의 사람을 전도했는지의 숫자보다,
내 입술에서 나온 사랑의 언어들이 훨씬 큰 복음입니다.
결국 그 사랑이 사람들을 이끌고,
그 사랑이 교회와 철학을 세우며,
그 사랑이 구원의 여정을 걷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오늘도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으로도,
어떤 신앙적 훈련을 했다는 것으로도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내 개인의 결단과 훈련일 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랑할 뿐이죠.
우리에게는 강요할 권리가 아니라 사랑할 권리만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주장이나 강요일랑 접어두고,
오늘은 그저 사랑하며 사세요.
뭔가 가르치려고 애쓰지 마시고,

사랑의 말을 전하며 사는 하루가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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