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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22 - 긍휼의 능력을 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갈2:10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바란 것은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가 마음을 다하여 해 오던 일이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변해도,
아침은 언제나 우리 곁에 옵니다.
마치 긴 터널을 지나 열리는 끝자락에 도달하듯이
왠지 우리 마음에 희망을 부어주는 그 빛처럼,
아침은 여전히 아침입니다.

늘 우리는 이 아침에 결정을 해야 합니다.
오늘을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오늘을 내가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말이죠.
비록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은혜를 기대하며
한 걸음씩 걷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좋습니다.
오늘은 새롭고요.
오늘은 또 다른 오늘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의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그들과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또한 그들과 다른 길을 가며 함께하는 꿈도 설명하죠.
바울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어느 것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만이 옳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과 다른 바울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을 인정했습니다.
거기서부터 협력이 시작되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눔과 일치, 조화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다름에서 공의가 드러나고, 
그렇게 다른 이들이 서로 내려와서 공평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빠트린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합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자신에게 유일하게 부탁한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 부탁을 헤어질 때 말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전제하고 협력의 악수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미에 언급하는 이유를 저는
이것이 중요한 말이었기 때문에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딱 한 가지, 꼭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내용의 중요성을 극대화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바랬던 것은 무엇일까요?
뜻밖에도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여기서 ‘가난한 사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프토코스]인데요.
우리가 잘 아는 팔복의 말씀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의 그 가난한 사람을 뜻합니다.
프토코스는 의미상 절대적인 가난을 뜻하는 말인데요.
조금 쉽게 말하면,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도 만나 쓰러진 자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는 버려두면 목숨이 위태로운 자였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죠.
그가 바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단순한 돈 문제의 가난이 아니에요.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또한 감정이나 정서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영원할 수도 있고, 일시적일 수도 있어요.
혹은 그들이 삭개오처럼 부자일 수도 있고, 
가버나움의 백부장처럼 권력자일 수도 있죠.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었습니다.

가난은 특정한 이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은 많은데 심령이 깨지고 상한 이들이 있고,
가진 권력은 많은데 공감의 능력은 깨져 부서진 이들이 있죠.
배운 것은 많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복음은 그들을 위한 것이죠.

저는 이 사실이 너무 놀랍고 감격스럽습니다.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기독교인의 숫자를 늘려달라거나,
그리스도의 권세를 만방에 알려달라는 것이 아니었어요.
단지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웃, 소외된 자들을 돌봐달라는 말이었다는 점이 가슴 떨리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성품이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에게서 가난한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에요.
강도 만난 이 곁을 지나던 레위인과 제사장이 있었죠.
그들과 사마리아인이 달랐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지위도, 성품도 아니었어요.
‘무엇을 보는가?’가 달랐을 뿐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동일하게 ‘그를 보고’라고 기록하죠.
‘그를 보고’라는 말이 각각 세 번 나옵니다.
그들은 어떤 것을 보았을까요?
아마도 제사장은 강도 만난 자의 피를 보았을 거예요.
그리고 떠올린 것은 자신이 피를 만질 수 없다는 것을 떠올렸을 테죠.
레위인이 본 것은 두려움이었을지도 몰라요.
피를 흘리고 쓰러진 그를 보고 자신도 강도를 만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도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까요?
반면,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강도 만난 자가 유대인이라는 것도, 
그가 어떤 직분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아니었어요.
단지 쓰러져 있는 자의 가난한 모습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도와주어야 할 것만이 보인 것이죠.
그 보는 눈이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듭니다.

겉으로는 큰소리치고, 자신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떠벌이는 이들이 있어요.
우리는 그들에게서 대부분 재수 없음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함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큰소리치는 만큼 허전하고, 자랑질하며 떠버리는 만큼 속은 텅 빈 그 불쌍한 영혼을 본다면요?
강한 척하고, 다 큰 척하는 이들,
잘난 척하고, 다 아는 척하는 이들,
그 안에 감추인 아픔과 목마른 갈증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다른 능력은 없습니다.
말을 잘할 것도, 무엇을 지킬 것도, 정해진 규율도 없어요.
단지,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
긍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그것만이 유일한 조건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을 찾는 능력,
어떤 사람에게서도, 그 안에서 가난한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능력,
긍휼의 능력을 오늘 여러분에게 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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