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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24 - 조금 손해 보며, 조금 억울하게 살면 안 되는 걸까요?


갈2:15~16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부러워했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시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했어요.
작은 바람조차도 그에겐 시가 되었습니다.
같은 책을 볼 때도,
같은 성경의 구절을 읽을 때도,
그에게는 늘 생각지도 못한 다른 언어가 나왔습니다.
종종 감탄에 마지않을 새로운 시선들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저는 눈 씻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그 어떤, 무언가가 그에게는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게 참 부러웠어요.
물론 제가 부러워했던 것은 
그의 시적 능력이나 지적 감수성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닮고 싶었던 것은,
그 소소함, 그 평이함 속에서
은혜와 감사,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영성이었습니다.
그리곤 그것이 타고나는 것도,
또한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님을 나중에 알았어요.
오직, 
늘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는 꾸준함만이
그 영성을 만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도 동일한 하루입니다.
그저 지나면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일 겁니다.
그러나 저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고 싶지 않아요.
오늘은 새롭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어제와 다른 오늘을 찾을 겁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간절함을 나눠 드리고 싶어요.

그 소소하고 평이한 오늘에서 새로움을 만들고 싶어요.
오늘에서 어제를 바라지 않길 빕니다.
오늘은 오늘로 족합니다.


갈라디아서의 핵심구절을 꼽자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인 16절을 꼽을지도 모릅니다.
앞서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바로 이 부분을 말하기 위한 것인지도 몰라요.
16절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다”

물론 이 중요 구절을 어찌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현재 이 둘이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유대인이 의로움을 추구하는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그리스도로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율법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논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어떻게 율법을 대체하는지,
그 말씀에 어떤 권위가 있는지 또한 논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율법과 그리스도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대체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아요.
어릴 적에 선생님과 등산을 한 적이 있었는데
미끄러져서 밧줄에 매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함께했던 선생님이 밧줄을 잡아당겨 저를 끌어올렸는데요.
조금씩 올라가는 밧줄만 붙잡고 매달렸던 저의 눈 앞에 드디어 손이 보였습니다.
선생님이 손을 내미신 거죠.
밧줄과 손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밧줄은 불안했지만 손을 보자 이제 살았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최근 목회자들만 주고받는 문자메시지에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사회적으로 여러 대립들이 있는 가운데
그 글은 예배를 중지시킨 정부의 조치에 대한 항의성 글이었어요.
논리 정연한 글에 일면 타당한 말이다 싶을 즈음에
한 구절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형평성이라는 말이었어요.
왜 다른 곳은 문을 닫지 않는데 교회만 문을 닫게 하느냐는 뜻이었습니다.

‘형평성’

저는 이 대목에서 암울함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형평성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죄 없으시면서도 그분은 죽으셨습니다.
일말의 형평성도 없이…
십자가보다 더 억울한 일이 없을 만큼
예수님은 그저 억울함도 지고 가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이고 정신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형평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평성을 믿고 가셨습니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차이가 어쩌면 그런 것입니다.
율법은 선과 악을 나누고, 억울함 없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게 기계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률적이고 사회적으로 우리의 삶을 재단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율법이 아닌 사랑으로 살도록 하셨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내가 율법으로 살았던 것을, 
이제는 사랑으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는 교회가 형평성이 없는 대우를 받으면 안 됩니까?
좀 억울하면 안 됩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손해 보면 안 됩니까?
그렇다고 십자가보다 더 억울할까요?
우리가 율법을 믿는다면 억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산다면 형평성 없는 대우는 죽기보다 싫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잖아요?
억울함의 대명사인 십자가를 지는 그분을 믿잖아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던 감정이,
이제는 이에도 사랑, 눈에도 사랑,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으로 살겠다고 한 것 아닙니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아닌가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의 종교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기준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에요.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히브리서 10:20에서
예수께서 “새로운 살길(new and life-giving way)”을 열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기준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좀 손해 보면 안 될까요?
조금 억울한 일 당하며 살면 안 되나요?
십자가처럼 말이죠.
그 십자가를 부활의 능력으로 세우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세워주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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