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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21- 다르기 때문에 협력할 수 있는 거예요.


갈2:9
그래서 기둥으로 인정받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서, 친교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사람에게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전히 안 좋은 소식들이 우리 주위를 둘러싸지만
우리는 또한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와 희망으로 오늘을 열기 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했죠.
고후 4:8~4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 아침에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되기를 빕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사도들과의 교분과 함께 서로 대등한 존재임을 과시합니다.
그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도들과 친교의 악수를 나눴다는 말은,
그들과의 친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협력과 연합의 의미가 더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친교라는 단어로 번역된 헬라어는 우리가 잘 아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는 이방인을 위한 사역과 유대인을 위한 사역을 따로 나눴다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각자가 서로의 사역을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 듯싶어요.

여기서 협력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 듯합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부분이 있어요.
협력이라는 것이 서로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나와 같은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고,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과 친교를 나눌 수 있다는 의미로 말이죠.
그래서 협력을 강조할 때 보면 유독 
생각이 같고 뜻이 같고 성향이 같고 스타일이 같은 것을 중요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협력은 같은 것에서 출발하지 않아요.
반대로 다른 것에서 출발하죠.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과 스타일을 가지고,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이 협력입니다.
그래서 협력에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바울과 사도들이 서로 다른 길을 감에도 친교의 악수를 나눴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협력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자꾸 남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 할까요?
나와 스타일이 같아야 하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갖도록 왜 자꾸 강요할까요?
물론 다르다는 것은 불편합니다.
다름에 대처하는 일은 어려워요.
그래서 협력은 서로가 뼈를 깎듯 인내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수적이죠.
나와 다르기에 나를 성찰할 기회도 되고,
나와 다르기에 맞추려고 애를 쓰며 낮아지기도 합니다.
합창이 딱 그렇습니다.
목소리가 다 다르죠.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가 다르고,
높은 파트와 낮은 파트의 음역대도 다릅니다.
그 다름이 깊어질수록 화음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협력은 바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이루어지는 것이죠.

우리에게 토론의 문화가 부족하다는 말을 많이 하죠.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토론 교육을 강화하는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기도 하죠.
그런데 토론을 하자고 하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법을 배워요.
말을 잘하는 것, 남이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촌철살인이 토론의 달인인 줄 알아요.
그러면서 토론을 배틀로 여깁니다.
싸우는 거죠.
토론을 놓고 승패를 가르고, 싸우는 것을 보면 정말 토론이 뭔지 모른다 싶어요.
정작 토론은 누군가와 경쟁하여 이기는 도구가 아닙니다.
토론은 나와 다른 이들의 생각과 의견을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토론을 하는 목적은 
나와 다른 이들이 있음을, 
나와 다른 의견과 생각이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양극화를 논하는 이들도 많죠.
빈부의 격차, 불평등을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여기는 분들이 많아요.
우리교회의 다림교육도 이런 문제를 다루고자 만들어졌죠.
그런데 다림교육이 추구하는 것은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격차와 불평등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조금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격차와 불평등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가 서로 다르게 창조되지 않았겠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격차나 불평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모든 문제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나와 다른 이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 나라임을 알 때 해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림교육에서 고등학교 멘토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어요.
이렇게 어렵게 사는 아이들이 있을 줄 몰랐다는 말입니다.
우스갯소리가 있죠?
부모 세대가 옛날에 먹을 것이 없어서 풀죽 먹었다고 하니까
자녀들이 그랬다고 하잖아요.
“쌀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잖아?”
몰인정하거나 잔혹해서 가난을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난이 얼마나 무섭고 참혹한지 몰라서 그래요.
내가 이러면 남도 이런 줄 아니까 남을 인정 못해요.
다른 생각, 다른 처지, 다른 감정을 인정하지 못하니까
싸우고 깨지고 대립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높은 사람이 있으면 낮은 사람도 있고,
부유한 사람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도 있어요.
여기에는 어떤 불법도, 어떤 불의도 없습니다.
부유하다고 불의한 것도, 높은 지위와 권세가 있다고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불의입니다.
높든 낮듯 나와 다른 사람들은 다 없애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불법이고 불의이며, 또한 악한 것입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나와 다른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자비이고, 교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치를 이루지 못하죠.

공의와 공평은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배려하고 나누며 조화를 이룰 때 
공의가 드러나고, 공평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가장 먼저 다름을 인정하세요.
저 사람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저 인간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거예요.
서로 다른 이들이 만나서 좋은 시너지를 내야 합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를 수 없어요.
나의 연약함이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될 수 있고,
누군가의 분노는 나의 사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우리들이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요.

오늘도 다 다른 우리가 조화를 이루는 하루입니다.
다 다른 생각들이 신기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하루죠.
다른 이들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데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도 화음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협력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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