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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17 - 내게도 아름다운 동역자를 허락해 주옵소서.


갈2:1
그 다음에 십사 년이 지나서, 나는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거센 빗소리가 걱정스럽게 마음을 두드리지만

그래도 오늘은 평화로운 아침이길 빕니다.
가까운 이들과 함께
더불어 함께 사는 아름다움이 
이 아침에 더욱 빛나길 빕니다.

갈라디아서 2장으로 들어섰습니다.
바울의 간증은 계속되는데요.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을 찾습니다.
바울이 회심 후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세 차례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된 방문이 몇 번째 방문인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이렇게 14년이라는 확실한 년수를 두고도
확정하지 못하고 논란이 있는 이유는,
14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의미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언어유희를 하듯 14라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뜻이,
충만하고 충분한 의미를 나타내고,
변화라는 의미로의 년수가 결합해서 완전히 변화된 상태의 때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물론 너무 알레고리칼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표현을 고린도후서 12:2에도 사용하죠.
그래서 이 본문의 14년을 꼭 14년이라고 해석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 해석은 우리가 신학자들에게 양보하죠.
중요한 것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말이죠.
완전히 바뀐 입장에서 예루살렘을 찾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변화의 와중에는 세월도 한몫했습니다.
고향에서의 와신상담한 시간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자신의 열정보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능력,
자신의 뜻, 자신의 깨달음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겸손한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특권이죠.

그렇다고 바울이 그 기다림으로만 변화를 이룬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복이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원래 이름이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된 후 교회 주변에서 그에게 별칭을 부여했어요.
그것이 바나바라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권면과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바나바는 누군가를 설득하고 위로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했기에 그렇게 불렀겠죠.

그는 시리아 안디옥교회에 파송을 받아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방 지역의 첫 교회로 
이방 선교의 교두보가 되죠.
그런데 바나바는 그 일을 바울과 함께 합니다.
누구도 함께 하고자 하지 않았던 바울을 찾아가
그와 함께 안디옥교회를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만들죠.
아마도 바울은 바나바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바울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와 함께하려면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죠.
누군가와 새로 하려면 나의 익숙함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놀라운 것은 그런 겸손이 사람을 키운다는 거예요.
바울이 바나바를 만난 것은 축복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죠.
바나바는 바울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바울답게 살도록 도와주었죠.
그러니까 바나바로 인해 바울의 능력이 드러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에 여러분을 축복하며,
한 가지 꼭 기도하고픈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역자의 축복입니다.
나를 나답게 일으켜줄 바나바를 만나는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낙심한 나를 일으켜 세우고,
의기소침해 있는 나를 다시 꿈꾸게 하는 동역자,
여러분에게 그런 동역자들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내가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기 이전에,
바나바와 같은 동역자를 만나는 축복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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