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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16 -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갈1:23~24
그들은 다만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그가 전에 없애버리려고 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 하는 소문을 들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두고 하나님께 줄곧 영광을 돌렸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내 앞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요?
물론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
다가오지 않은 시간을 예단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어쩌면 이 아침에
우리의 오늘은 결정될지도 몰라요.
내가 어떤 기대감을 갖느냐에 따라서 말입니다.

굳이 긍정적이나 부정적인 이분법으로 나누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우리의 눈에 보인다는 거죠.
이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목회를 시작하면서 제게 자동차가 필요했어요.
구입해야 할 차량은 좀 조건이 까다로왔죠.
사람들도 많이 타야 하고,
짐도 실어야 하며,
튼튼해야 하고,
무엇보다 값이 싸야 했습니다.
좋은데 값도 싼 물건은 없다고 하죠.
그런데 기막히게도 그런 차를 구할 수 있었는데요.
그 차가 좀 특이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자동차 제조회사에서 만든 차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만큼 그 차를 타는 사람이 없었어요.
실물을 보려고 해도 길거리에 다니는 차가 없었죠.
그래도 용기를 가지고 그 차를 샀고,
제게는 그리도 딱 어울리는 차가 없을 만큼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어요.
그 차를 타고 다니면서 거리에 같은 차들이 많아진 거예요.
하나둘씩 눈에 띄더니
나중에는 거리에 온통 그 차밖에 보이지 않더라고요.

실제로 많아졌을까요?
제가 차를 산 이후로 실제 판매량이 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어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그 자동차 회사에서 상 받아야겠죠.
다만, 중요한 것은 수많은 차량 가운데 유독 제 눈에
그 차량이 더 잘 보인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기대하고, 만족하고, 찾으니까요.
기대감의 힘은 현실적으로 정형화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기대하는 나는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죠.

바울은 1장 마지막에서 선택의 문제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 짧은 본문에서 바울은 
같은 조건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하는 2가지 부류의 사람을 보여주죠.
같은 조건이란 이런 것입니다.
바울은 유명한 유대교 신봉자였고, 또한 악명 높은 반 기독론자였죠.
마치 노예 사냥꾼처럼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잡아갔습니다.
아마도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그의 이름을 거의 들어봤을 거예요.
언제 내가 그의 손에 잡힐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날뛰던 바울이 변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얼굴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지만,
그 소문은 삽시간에 펴졌어요.
그만큼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는 민감한 문제였으니까요.
아마도 바울의 행동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의 회심의 사건은 더 충격적이었겠죠.
여기까지가 팩트입니다.
같은 조건이죠.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2가지로 나뉘었어요.
그의 회심을 믿을 수 없다는 쪽과,
반대로 그의 회심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말이죠.
오늘 본문은,
그의 회심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반대로,
그의 회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 또한 존재했음을 은근히 내비치죠.
그리고 우리에게 언중유골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같은 조건에서 너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고요.

이런 종류의 선택은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예민한 감정선이 있을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스토리가 존재할 수도 있으니까요.
혹여라도 실제 바울의 박해로 인해 가까운 이들이 고초를 당하고,
때론 죽임을 당하는 경험을 겪은 이들이라면
결코 감사하거나 그 회심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는 지극히 힘들었을 테니까요.
반면, 
조금 먼 제삼자의 관점에서 이 일을 바라볼수록,
오히려 용서와 감사는 더 용이해질 수도 있을 거예요.
이 민감한 문제 앞에서 칼로 무 자르듯 문제의 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대를 하느냐에 따라 우리 앞에 놓이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는 거죠.
실제로 바울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문제이니까요.
그러나 기대하고 바라보는 우리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채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심은 의심을 부르고,
감사는 감사를 부르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는 예측은 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많이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어요.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어떤 이들은 지나친 긴장을 합니다.
그들의 패턴은 다양하지만 뿌리는 같아요.
‘내가 실수하면 어떡하지?’
‘내가 망치면 어떡해?’
온통 자신이 잘 못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지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상상은 곧잘 현실이 됩니다.
컵을 깨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현실이 되죠.
그리고 하는 말,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말이 멋있을까요?
그런 예측이 맞아떨어져 기분이 좋은가요?
왜 우리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에 목메며 묵상할까요?
왜 우리는 나에게 나쁜 영향에 대해 더 집착할까요?
왜 우리는 더 좋은, 더 바라는 기대는 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잘못될 것에 대비한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우리의 인생은 잘못할 것을 대비하고 경계하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잘하고 좋고 행복한 것을 만들며 살아가는 거예요.
운동경기에서 수비만 해서는 이길 수 없어요.
최대의 결과는 단지 무승부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기려면 수비가 아니라 공격을 해야죠.
공격에는 위험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래도 또 일어나 시작하는 거예요.
실점보다 더 많은 골을 넣으면 되고,
실수보다 더 많은 감사를 만들면 되죠.
그러니 좋은 것을 묵상하세요.
좋은 시간, 좋은 마음, 좋은 미래를 기대하세요.
좋은 상상을 하세요.
안 될 일보다 될 것을 믿으세요.

사람은 다 변해요.
바울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고,
그의 속 마음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르죠.
그러나 우리가 기대는 할 수 있잖아요?
작게는 우리를 잡아가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에서
크게는 좋은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까지,
우리는 기대할 수 있잖아요.
사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잖아요.
그럼 다른 생각하지 말고 좋은 것을 기대하세요.
괜한 나쁜 상상하지 말고요.
내가 원하지도 않는, 바라지도 않는 나쁜 예측은 하지 말고요.

기대하는 대로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돼요.
그것은 주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우리의 의지가 동원되고,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우리의 눈이 떠지기 때문이에요.

진짜 바라는 것을 기대하며 사세요.
오늘도 즐겁기를 바라시죠?
오늘도 행복하기를 바라시죠?
그럼 괜한 걱정, 이러면 어떡해? 저러면 어떡해? 걱정일랑 접어버리고
오늘 맞이하고 싶은 하루, 
오늘 되고 싶은 자아를 기대하고 상상하며 이 아침을 시작하세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오늘 저녁 이 말이 여러분을 미소 짓게 만들지,
아니면 후회하게 만들지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저는 웃으며 이 말을 할 거예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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