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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15 - 당장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마세요. 기다림은 일의 순서 중 하나입니다.


갈1:21~22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는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한국에 처음 소개한 찬양이 있습니다.
아주 짧은 외국 찬양인데요.
Mary Wetzel Freeman이 작곡한 Let's Take Time이라는 찬양이죠.
저는 이 찬양을 ‘이 시간 주님 기다려요’라고 번역했어요.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 시간 주님 기다려요.
이 시간 주 음성 들어요.
주께서 세우지 않으면 수고 헛되네
자 이 시간 주님 기다려요.

이 찬양은 시편 127편을 기초로 작곡된 곡이에요.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된 일이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하죠.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주님이 움직이시지 않으면 헛된 일이라고요.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번역되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본문이기도 하죠.
이 곡의 작곡가는 그래서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말하죠.
우리의 수고, 우리의 애씀도 필요하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기다림이 있다고 말입니다.

이 새벽에 일어나 캄캄한 창밖 하늘을 바라보며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침을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일찍 일어나 분주히 움직여도 
결국 아침의 시간은 주님의 시간에 달려있기 때문이죠.

바울의 간증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유대교 추종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이야기,
아라비아에서의 시간과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만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그다음으로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고 해요.
그의 과거 행적은 담담한 어투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이 담담할수록,
오히려 제 가슴은 더욱 먹먹해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 행간에 담긴 그의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죠.

마치 시리아를 거쳐 갈리기아로 간 것처럼 적힌 본문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오히려 정설은 반대로 갈리기아를 거쳐 시리아로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으로 알려진 다소라는 곳이 있는 지역입니다.
이는 그가 그곳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죠.
또한 시리아는 바울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한 안디옥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동역자 바나바에 의해 바울이 복음 전도자로 나서게 된 곳이죠.
그런데 바울이 고향 다소에서 안디옥교회로 부름 받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다수의 학자들은 이 기간이 거의 10년 정도 걸리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그 기간 동안 바울은 고향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청운의 꿈을 품고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던 바울이
한낱 부질없음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었을까요?
아니면 고향에서 할 일이 있었을까요?
물론 고향에서의 그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그가 고향에 얼마나 머물러 있었는지도 논쟁거리니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의 처지가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아마도 바울은 자신의 회심에 대해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자신은 생생히 그리스도를 경험했고, 
불타는 마음으로 옛 학식들을 버릴 만큼의 결단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을 거예요.
어쩌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해 주고 반가워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상황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어제까지 자신들을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켰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상황을 순순히 받아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반응은 당연하죠.
회심 후 처음 갔던 다마스쿠스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을 거예요.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오해를 받는 상황,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 답답함이 그를 아라비아로 이끌었을지 모르죠.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죠.
그때도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만약 바울의 마음이 잘 통했다면 예루살렘의 만남에서 바울이 바로 사역을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못했어요.
여전히 경계심이 있었고, 여전히 검증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설상가상 이번에는 자신이 몸담았던 유대교에서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습니다.
그의 회심은 이제 양쪽으로부터 버림받을 처지가 된 것이죠.

사람이 제일 답답하고 속상할 때가 자신의 진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죠.
열정은 가득하고, 하고 싶은 일은 많습니다.
맡겨만 준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할 자신도, 마음도 있는데요.
그런데 정작 맡겨주지를 않습니다.
그때 몰려오는 답답함은 자신의 가슴을 찢어서라도 속 마음을 보여주고 싶게 만들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열정이 가득할수록,
우리의 열심이 불을 뿜을수록,
열리지 않는 환경, 받아주지 못하는 상황에 더 화가 나죠.
가령, 자신이 잘못을 하고 그것을 깨달아요.
그리고 용서를 구하고 사과를 하죠.
그런데 상대는 그 사과를 받을 마음이 없어요.
그러면 어떤가요?
아마도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내가 사과를 했는데 안 받아?’
‘내 진심을 안 알아줘?’
이러면서 불평하고 상대를 탓하기 십상이죠.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일은 정말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죠.
그런데 그것은 내 일이고요.
만약 상대가 있는 일이라면 그도 나와 같은 깨달음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내가 괜찮다고 남도 괜찮은 것은 아니잖아요?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할 수는 없잖아요?
내게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남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면, 남을 기다려 줄줄 알아야 하죠.

바울이 고향 다소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 시간이 얼마니, 무슨 일을 했느니, 그런 것을 따질 생각은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바울이 고향에서 때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변화를 겪었던 것처럼, 상황도 변화되기를 기다렸고요.
자신이 준비되면 준비된 만큼 주님이 길을 열어주시기도 기다렸다는 거예요.

당장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마세요. 
기다림은 일의 순서 중 하나입니다.
기다림은 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일하는 시간이에요.
내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죠.
일은 벌써 시작되었고, 사역은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역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기다림이에요.

내가 아무리 준비가 되어 있어도,
내가 아무리 열정이 차고 넘쳐도,
조화를 이루시고,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때를 만드시죠.
그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 오지 않았다고 아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새벽도 아침의 일부예요.
깜깜함도 빛의 일부죠.
아픔도 기쁨의 일부이고, 고난도 감사의 일부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사역은 이미 출발했어요.

기다림도 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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