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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20- 돌아보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갈2:6~8
그 유명하다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아무런 제안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든지,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 유명한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런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과 같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는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신 분이, 나에게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하루를
은혜와 감사로 채우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갈라디아서 묵상을 시작하면서
바울이 약간 화가 난듯한 모습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죠?
오늘 본문도 그 감정이 드러납니다.
아마도 바울은 사도라는 권위로 인한
많은 비교를 당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초대교회 지도자들을 유명인으로 묘사하죠.
이는 약간의 비꼬는 말투처럼 들립니다.
갈라디아의 교인들을 현혹하고 흔들었던 이들이
주로 사용했던 사도들이 어떠니, 권위가 어떠니 하는 말에 대한 항변이겠죠.

거기에다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고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강조하죠.
물론 이는, 유명세나 사도의 권위를 부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쉽게 현혹되는 한 가지 일에 대한 경고로 비쳐요.
바로, 눈에 보이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대해 쏠리는 판단들이죠.
유명한 것이 마치 주님의 권세인 것처럼,
더 많고 높은 자리가 마치 은혜의 증거인 것처럼,
사람들의 인정이 마치 주님의 섭리인 것처럼 여기는
우리의  얄팍한 지식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릅니다.

유명하다고 말한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미 언급한 베드로나 야고보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말하죠. 
그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서 어떤 율법을 지켜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 준다는 언질을 받은 바 없다고 말이죠.
한 마디로, 
어떤 사도도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짓 교사들이 강조해 마지않는 사도들의 견해와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먼저 말하죠.
그러면서 중요한 말을 던집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자신이 다른 사역, 다른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이죠.

할례의 유무를 언급하는 것은
아마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명을 받았고,
자신은 이방인을 위한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말이 딱 맞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베드로 또한 이방인을 전도한 일이 있고,
바울도 유대인을 위한 사역을 한 적도 있으니까요.
아마도 그들이 뚜렷하게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며 사역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다만 결과적으로 보니 그렇다는 의미가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찌 되었건 그들은 같은 길 다른 사명으로 사역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바울은 바울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역할을 다한 것으로 사역했죠.

여기에 그들의 자라온 배경이 존재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자산 삼아 사역을 합니다.
그의 타고난 성질(?)은 강한 추진력으로 교회의 발판이 되었고,
그의 배신은 연약함의 간증이 되어 
어려움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이의 위로가 되었죠.
반면, 바울 또한 바울의 타고난 성품이 사역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어려서부터 배운 학문성이 그를 기독교의 설계자로 만들었고,
유대인이면서도 로마 시민권자였던 출신성분이
그를 세계 선교사로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가정을 갖지 않았던 것조차 그의 사역에 쓰이죠.

간혹 우리는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살았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배운 것은 현재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보이고,
내가 경험한 일들은 마치 안 맞는 옷처럼 보일 때가 있죠.
그래서 ‘그때 내가 이럴걸?’하는 후회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고 푸념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요.
돌아보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인생에 버릴 것이 없을 만큼 다 이유가 있어요.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다던 옛 지식들은
대부분의 신약성경을 집필하는 원동력이 되듯이,
기독교인들을 처단하려 달려들던 그의 열정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세계 선교에 매진하는 추진력이 되듯이,
우리의 과거, 우리의 지난날들을 허락하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를 뿐, 모든 것이 다 이유가 있어요.

지난날을 후회하기 이전에,
지난날의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쓰이는지 찾아보는 것이
훨씬 은혜로운 생각일지도 모르겠어요.
나의 못남, 나의 잘못된 인생을 저주하기 이전에,
편협하고 삐뚤어졌던 나의 성격이 
어떻게 이리도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는지를 찾는 것이 
믿음일지도 모릅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좋은지, 어떤 삶이 성공한 삶인지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삶을 살든지, 그 삶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이라면
그것이 성공한 삶이지 않을까요?

후회되는 일도 돌아보면 간증이 될 수 있고,
하기 싫었던 한 일도 돌아보면 훈련의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아픈 상처 또한 돌아보면 성장과 성숙의 디딤돌이었고,
지랄 맞은 성질도 돌아보면 삶의 동력으로 사용되죠.
그러니 하나도 버리지 마세요.
나의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아브라함처럼 좌충우돌 갈지자 같은 인생도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딤전4:4)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들쭉날쭉해도 감사함으로 돌아보면 다 쓸모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조차도 감사함으로 돌아보면
많은 이들을 위로하는 은혜로, 
나를 주님께로 이끄는 동력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다 생긴 대로 산다고 하죠?
다 생긴 대로 사역도 합니다.
그러니 후회하는 인생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마세요.
다 이유가 있음을 인정하며 사세요.
언젠간 쓰일 일들로 차곡차곡 모아두세요.
먼 훗날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다 이유가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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