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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갈라디아서묵상일기

갈라디아서묵상 26 - 익숙함과의 결별에서 새로움이 시작됩니다.


갈2:19~21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 좋은 아침에 오늘의 본문이어서 더 좋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마음이 내 가슴을 뒤덮었던 그 밤을 지나고,
오늘 같은 새로운 아침에 저는 
어느 수도원의 정원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제도 보았고, 그제도 보았던 그 정원,
꽃들과 나무, 그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어요.
마치 오늘 처음 보는 광경처럼 새로웠습니다.
꽃잎들은 하나같이 곱디고왔고,
푸르름은 향기로울 만큼 달콤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주님이 나를 위해 주신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더 새롭고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때 내 귀를 두드리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혹시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배운 적이 있으신가요?
카메라를 배운다든지, 혹은 운동을 배운다든지,
아니면 악기 같은 것을 배운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어릴 적에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누님들은 다 피아노를 치는데 저만 안 배웠어요.
남자라서 피아노를 가르치지 않으셨는지,
아니면 잊어버리신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부모님은 저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피아노를 치는 가족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혼자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어요.
집에 피아노가 있었던 것이 한몫했겠죠?
내 나름대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거죠.
그것을 독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내 나름대로 피아노를 쳤어요.
그런데 찬송가를 못 치는 거예요.
악보를 보고서는 그대로 치지 못하는 거죠.
악보 없이 치는 것이 훨씬 쉬웠습니다.
다 나.름.대.로 치니까요.
좋은 말로 나름대로지, 다른 말로는 마음대로 치는 거죠.
그래서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뭐가 가장 힘들었는지 아세요?
피아노를 배우는 것도, 악보를 보는 법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 나름대로 칠 수 있는 나만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거였어요.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악보대로 치려면 너무 힘들고 어려운데,
내 나름대로 치면 뚝딱 연주를 그럴싸하게 해내기도 했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을 버리려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내게 익숙한 방법, 내가 지금까지 해온 방식을 버리지 못해서
새로운 것을 익히기가 힘들었던 거죠.
더 기막힌 것은, 지금 현재로 보면 내 나름대로가 훨씬 괜찮아 보였다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익숙한 방법들,
내가 살아온 방식, 혹은 나름대로의 습관들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몰라요.
그래야 새로운 방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나의 습관, 나의 나름대로 방법을 버리면,
그다음은 이제 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피아노 선생님이 가르쳐준 방법들, 
혹은 코치의 지도에 따라 한 동작 한 동작을 따라 해야 합니다.
마치 내 안에 코치가 들어와 나를 움직이듯이 말이죠.
그래야 내 안에 새로움이 정착하죠.

신앙생활은 나의 방식을 먼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개라고 하죠.
사람들은 회개를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넓은 차원에서 회개를 말하자면,
회개는 내가 살아왔던 이전의 방식을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의 습관에서부터 가졌던 가치관까지 말이죠.
그렇게 내려놓아야 새로운 길이 열리고,
그렇게 죽어야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이전에 내가 원하던 삶은 기계적인 중립이었고,
물리적인 공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며,
나로 인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누므로 이루어지는 공평의 시간을 삽니다.
이전에 내가 원하던 정의는,
선악의 구분이었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안에 품은 정의는,
의인도 죄인도 모두 생명이며 내 이웃이고,
권선징악이 아닌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죠.
그렇게 내가 지녔던 가치가 죽어야 새로운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고,
그렇게 내가 추구했던 진리가 죽어야 주님의 말씀이 이해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만나기 전 바울은 무자비했습니다.
그의 발 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어요.
그가 그리도 무섭고 무자비했던 것은 성격 때문이 아닙니다.
무언가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에 익숙해있고, 자신만의 세계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죠.
내가 익숙해져 있는 세상은 다른 세상을 적대시하기 쉽습니다.
어쩌면 모든 다툼은 내 익숙함에서 나오는지도 몰라요.
세대 간의 갈등도, 나라와 인종 간의 갈등도
자기 나름대로의 익숙함에 젖어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렇게 익숙함이 법이 되어버려 당연하게 살아왔는지도 몰라요.

내 익숙함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것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다는 주장에서 벗어나야 남의 처지도 보이죠.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자신의 익숙함입니다.
익숙한 자리를 벗어나야 새로운 자리에 갈 수 있고,
익숙한 생각을 버려야 새로운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익숙한 시선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눈이 떠지고,
익숙한 나를 넘어서야 비로소 이웃이 보입니다.
회개는 그렇게 나를 내려놓는 거예요.
그렇게 회개는 익숙함과의 결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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