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신명기묵상72- 우리도 오늘 선택을 해야 합니다. 신명기 27:1-10

신명기에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지만
오늘 본문의 대전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라는 것이죠.
그 전제 아래 방법론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먼저, 돌에 말씀을 새기라는 말씀이 있네요.
당시 돌에 석회를 발라 그 위에 글을 쓰는 풍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것을 차용해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돌판에 말씀을 새겨주시는 것을 떠올립니다.
변하지 않고, 지울 수 없는, 확고한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우리에게도 적용하면 이렇지 않을까요?
그 돌이 나의 심장이면 어떨까요?
그 돌이 나의 이마이면요?
출애굽기 13장에 이런 말씀이 나오죠.
출 13:9, 당신들의 손에 감은 표나 이마 위에 붙인 표와 같이, 당신들이 주님의 법을 늘 되새길 수 있게 하십시오.

또 이 말씀은 귀로 듣는 말씀이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이 말씀은 가치관에 심는 말씀이 되고,
이 말씀은 삶의 습관으로 삼으라는 말씀이 되죠.
가치관이나 삶의 습관은 부지 중이라도 행하는 기초 중의 기초이죠.
좋은 가치관과 좋은 습관이 사람을 만듭니다.
그 말씀이 그래야 한다는 것이죠.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제 무릎에 흉터가 하나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 외할아버지 댁에 갔다가 데인 자국이죠.
할아버지의 곰방대에 데었습니다.
너무 어릴 적이라 다른 것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또렷이 기억하는 것이 있어요.
할아버지 방에 있는 화로와 곰방대, 그리고 할아버지의 모습이에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내 몸에 흉터가 없어지지 않는 한 말이죠.

상처도 가슴에 새겨지죠.
많은 이들이 상처로 아파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있어요.
왜 유독 아픔과 상처, 안 좋은 것들은 기억이 더 날까요?
왜 그런 것들은 더 잘 새겨지고 잊히지 않을까요?
왜 말씀은 그렇게 새겨지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제 눈에 들어온 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에발산이라는 단어인데요.
말씀을 돌에 새겨 에발산에 세우라고 하시죠.
왜 에발산에 세우라 하셨는지 궁금했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런 궁금증 가운데 한 가지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에발산이 어디 있느냐 하면, 세겜이라는 곳에 있거든요.
세겜이라고 하면 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지막에 속하는 유명한 설교죠.
그 설교는 이것입니다.
수 24:15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상처를 새길 것인지, 축복을 새길 것인지를 말입니다.
내 주위에 상처가 많고, 힘든 일이 많아서 한이 맺힌다고요?
내 주위에 축복도 많고, 하나님의 은혜도 많습니다.
무엇이 많아서도, 무엇이 강해서도 아닙니다.
문제는 선택입니다.
내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 무엇을 추억할 것인지의 선택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 나눴죠?
악은 성실하다고요.
우리는 무엇에 성실할까요?
무엇에 성실할 것인지, 무엇에 끈기 있을 것인지의 선택입니다.
자연스럽게, 편안히,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가는 선의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는 것이죠.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도 의를 선택하고, 선을 선택하는 여러분이길 빕니다.
비록 눈 씻고 찾아볼 만큼 선한 일이 없고, 웃을 일이 없다 하더라도,
그 작은 겨자씨 같은 은혜와 믿음, 선함과 감사를 선택하는 자에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로 불어나는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