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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신명기묵상67 - 그리스도인은 권리만 누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 24:17-22

유독 이스라엘과 한국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남북이 갈라졌던 모습이라든지,
외세에 의한 민족적 수난들도 많이 닮았습니다.
언어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인사말인 이스라엘의 ‘샬롬’과 한국의 ‘안녕’은 모두 평화를 의미하죠.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도 똑같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지칭할 때,
‘아비’라고 말하는 발음도 똑같아요.

이런 모습만 닮은 것은 아닙니다.
상생의 조화를 추구하는 모습도 닮았어요.
까치밥이라는 것을 아시죠?
우리 조상들은 감나무 같은 열매를 딸 때,
열매의 일부를 일부러 따지 않았습니다.
까치와 같은 새들의 먹이로 남겨 두었던 것이죠.
이 때문에 새들은 넉넉히 겨울을 날 수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경주 최부자 집의 육훈에는 이런 구절도 있죠.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이를 보면 우리 옛 조상들은 공존을 실현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이스라엘에도 나그네 환대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보통 6가지 덕목을 최고로 여겼는데요.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
병자를 문안하는 것,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말씀을 열심히 배우는 것,
아이들에게 율법을 전하는 것,
이웃의 좋은 점만을 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 것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이었죠.

룻기에 보면, 보아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보아스라는 이름은 유력자라는 뜻으로,
이름처럼 그는 그 지방에서 넉넉한 재물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는 원칙이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추수할 때 곡식을 일부 남겨놓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가난한 이웃으로 하여금 가져가도록 하기 위해서죠.
이를 통해 롯과 나오미가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모습이죠.

14세기 영국과 프랑스는 기나긴 전쟁을 했습니다.
이를 소위 백년전쟁이라고 하죠.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도시 ‘칼레’라는 곳이 영국에 함락되었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는 항복한 칼레의 시민들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본보기로 처형당할 대표자 6명을 요구했죠.
이 때문에 칼레의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누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죽을 대표자가 될까 서로 눈치를 보았던 것이죠.
그때, ‘생 피에르’라는 사람이 가장 먼저 자청하며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는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이며 유력자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뒤따라 지도자들이었던 귀족들이 처형에 동참했습니다.
이를 본 영국 왕은 그들의 모습에 감복해서 다 살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죠.
이로 인해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는 말이 만들어졌는데요.
그 말이 프랑스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권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의무를 갖는 것이죠.
마치 노블레스 오블리주처럼, 책임을 갖는 것입니다.
먼저 믿은 이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게 이웃사랑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공존의 미학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권리만 누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받은 사랑을 나눌 의무가 있고,
만난 주님을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이웃을 책임질 의무가 있고,
주신 은혜를 베풀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게 영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바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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