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신명기묵상66 - 법보다 사랑입니다. 신명기 24:8-16

신명기 24장은 한 절 한 절의 주제가 다릅니다.
그만큼 규정이 많다는 뜻이죠.
그래서 구절마다 해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도 어림잡아 4가지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쉽게 볼 주제들도 아닙니다.
한 가지씩 간단하게 짚어 보겠습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현대적 의미로 해석해 보죠.
구절마다 제목을 달아보겠습니다.

8~9절, 가장 치명적인 병은 영적인 병입니다.

나병은 한센병을 말합니다.
소위 문둥병이라고 불렸죠.
박테리아의 일종인 나균에 의해 신경이 마비되어
신체 부위가 썩고 떨어져 나가는 치명적인 전염병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나병은 절망적인 병이었습니다.
이유는 나병을 의학적 관점이 아닌 영적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나병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동원되는 사람은 의사가 아닌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말은 나병이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영적인 질병으로 판단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미리안의 예를 들고 있죠.
아시다시피 미리안은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나병이 걸렸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질병이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병이라는 뜻이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사람들에 실망하고, 미워하고, 관계를 끊기도 합니다.
상황이나 환경에 낙심하기도 하죠.
지도자나 권위에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각기 개별적인 문제죠.
개개인의 사람됨에 따라, 문제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를 보면,
이웃을 만나게 하시고, 상황을 주시며, 지도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불신이 기반 임도 틀림없죠.
이때 가장 절망적인 병에 걸립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생기면
그것으로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가 이곳저곳에서 드러납니다.
영적인 병에 걸리면,
어떤 사람과도 관계할 수가 없고,
영적인 병에 걸리면,
어떤 상황이 와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병은 가장 치명적인 병이 되죠.

10~13절,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어제 헌법재판소에서 중요한 판결이 하나 있었습니다.
낙태죄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인데요.
이로써 낙태죄 관련 법률은 다시 개정되게 되었습니다.
이를 놓고 찬반양론이 거셉니다.
특별히 종교계에서 반발이 심한데요.
현장에서 시위하던 분이 이렇게 외치더군요.
“이제 한국은 살인을 정당화하는 나라가 되었다.”
저는 분명 낙태가 살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죄에 대한 법률은 개정이 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삶은 법률로 모두 규정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법률은 가장 낮은 단계의 가이드일 뿐이기 때문이에요.
법률이 있다고 살인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법률이 없다고 살인이 다반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양심이고, 우리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완성이라는 말에는 율법이 미흡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죠.
그분은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시키셨습니다.
이 의미는 우리의 삶을 율법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가치는 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법적으로 아내이고 남편이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사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니까 살인하지 않고 이웃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기에 이웃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돈을 빌려줄 때 담보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유대인들의 담보 가운데는 겉옷이 있었습니다.
이미 겉옷과 속옷에 대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죠?
마태복음 5장에 겉옷과 속옷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른뺨, 왼뺨 이야기, 오 리를 가라 하면 십 리를 가라는 이야기와 함께
이 겉옷 이야기가 나오죠.
저는 어릴 적, 이 말씀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성경이 잘못 기록했다고 생각했어요.
상식적으로 보면 반대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어라가 맞죠.
우리에게는 겉옷이 더 주기 편하니까요.
그런데 이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잘 몰라서라는 것을 나중에 공부하고 알았습니다.
유대인 여행자들에게는 속옷은 여러 개였습니다.
그런데 겉옷은 하나였죠.
유대의 광야는 밤낮의 기온 차가 심했습니다.
보통 몇 도 차이가 아니라 심할 경우에는 3~40도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그래서 속옷은 얇게 입어도 겉옷은 두툼하고 따뜻한 재질이죠.
밤에는 이불의 역할도 하는 중요한 의복입니다.
그래서 유대 여행자의 재산 중에 가장 비싼 것이 향유와 겉옷이었습니다.
그 겉옷을 담보로 맡기면 많은 돈을 빌릴 수가 있었죠.
그런데 겉옷이 없으면 여행자에게는 위험합니다.
밤에 얼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빼앗은 물건이 아니라 담보이기에 돌려줄 법적 책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은 그것을 밤에는 돌려주라고 말하죠.
이 또한 이유가 간단합니다.
생명에는 법적인 효율성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긍휼과 사랑의 법을 동원하라는 것이죠.

법,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우리가 따라야 할 법은 사랑법입니다.

14~15절,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한참 갑질 논란이 벌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갑질은 어디선가 계속되겠죠.
어느 한 식당에서 종업원들에게 유니폼을 입혔답니다.
그 유니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데요.
“저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아들 딸입니다.”
종업원이라고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이죠.
어제도 묵상했지만,
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유익을 취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말이죠.
우리에게 단순히 외국인 노동자들이지만
그들 또한 누군가에게는 귀중하고 소중한 자식들입니다.
게다가 그들도 자신의 나라에서는 자부심 가질만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가난 때문에 이 나라에서 그저 똑같은 낮은 사람 취급을 받죠.

생명을 어떤 직업이나, 위치, 혹은 직무로 판단하지 마세요.
생명은 모두 똑같은 생명입니다.
나의 생명과 똑같은 생명입니다.
피부색이 달라도 같은 생명이고,
나이가 달라도 같은 생명입니다.
돈이 많고 적음도,
종교적 차이도,
사회적인 신분으로도 생명은 차별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16절, 니 아버지 뭐하시노?

자녀의 교제 소식에 부모들이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뭐하시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 중에
부모의 유산이 자식에게도 흐른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자식이 부모의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집안의 가풍에 따라 성품이 형성되는 것도 맞아요.
그렇다고 집안이 나쁘면 자식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문제 있다고 자식도 문제아가 되는 것도 아니죠.

옛날에는 연좌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도 미치는 것이죠.
3족을 멸한다는 것이 바로 연좌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에도 살아있습니다.
법으로 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 부모에 그 아들이다… 이런 마음이 살아 있죠.
구원이 부모로 인해 상속되는 것이 아니듯
각자의 삶은 새로운 삶을 살아갈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너무 긴 해설이었습니다.
오늘 또한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죠?
법보다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법이에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