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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신명기묵상68-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능력입니다. 신명기 25:1-4

구약을 읽을 때 보면, 현재 우리 상황에 맞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어느 경우에는 완전히 반대되는 경우도 있죠.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어서 오히려 구약의 규율은
무자비하고 무가치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오늘도 짧은 본문 가운데
각기 다른 3가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같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죠.

첫째는, 태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때리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죄를 지어야 받는 형벌이긴 한데요.
요즘은 꽃으로라도 때리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때리는 것은 인격 모독에 속하죠.

두 번째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합니다.
유대 땅에는 곡식을 타작할 때 보통 2가지 타작법이 있었는 데요.
그중 하나가 곡식 위로 돌 같은 것을 소가 끌고 다니며
타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곡식을 타작하다 보면 소가 곡식을 주워 먹죠.
그래서 망을 씌웁니다.
다른 의미로 생각하면,
최근 대형견들에 의한 사고들이 많은데요.
대형견에 대한 입마개가 법으로 의무화하기도 했죠.
그런데 그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세 번째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됩니다.
형이 죽을 경우, 형의 아내를 동생이 맞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계대 결혼이라는 풍습이죠.
오늘날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경우를 다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구약의 율법을 오늘날에 일치시키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그러나 구약을 읽는 우리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말씀의 ‘의도’입니다.
말씀이 주어진 의미 말이죠.
이것을 다른 말로는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신앙이죠.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것은 불문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접근이 다르죠.
이것이 ‘너도 당해봐라’라면 복수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태형은 복수의 의미가 아니죠.

유대 전통에 따르면,
태형 집행 시 재판관이 태형을 지켜본 다음,
맨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하고 끝났답니다.
“주께서 자비로 저희의 죄를 사하셨도다”

아이들을 훈육할 때 잘못에 대한 복수를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잘못에 대한 가르침이 중요한 요소이죠.
오히려 훈육을 통해 더 이상 그 잘못에 대해 논하지 않게 됩니다.
어쩌면 훈육은 잘못한 자녀에게 자유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본문은 40까지 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무한대의 의미를 지닌 숫자죠.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때리지 말라는 이야기고요.
다른 의미로는 용서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소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과,
계대 결혼에 대한 것은 조건을 보아야 합니다.
소나 개가 사람에게 위협이 될 때는 망을 씌워야 합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앞에 있을 때는 풀어야 하죠.
이것을 사람으로 대비하면,
사람에게 최소한의 인격적인 도리는 다하라는 뜻입니다.
굶주린 사람을 보고도 혼자 먹지 말라는 의미기도 하죠.

계대 결혼은 어떤가요?
현재 일부다처나 계대 결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액면 그대로 보기 힘들죠.
문제는 의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계대 결혼의 조건이 나와 있습니다.
형이 후사가 없을 경우라는 조건이죠.
당시 대를 잇지 못한 과부는 버려진 여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 과부는 대부분 이방인에게 팔려가듯 했죠.
이 말씀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이들을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곁에 있는 이웃, 가족들의 아픔에 책임을 가지라는 말이죠.

꿈보다 해몽인가요?
그런데 꿈보다 해몽이 더 좋아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행동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내면에 보이지 않는 마음, 의도, 생각을 읽을 줄 알아야 하죠.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이니까요.

최근 어떤 광고를 보니까 이런 카피가 있어요.
“아버지는 나이만 먹고 밥은 안 드신다.”
홀로 사는 아버지에게 전화해 밥 잘 드시냐고 묻습니다.
아버지는 잘 먹고 있다고 말하죠.
그러나 아버지는 밥맛도 없고, 기운도 없어 못 드십니다.
그것을 전화상으로 자녀가 아는 거죠.
분명, 밥 잘 먹고 있다고 말했는데,
자녀는 그 내면을 읽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능력입니다.
보이는 행동보다, 그 행동을 야기한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읽는 것이 능력이에요.
그 능력이 사랑을 만들고, 긍휼을 부릅니다.
그 능력이 용서를 만들고, 이해를 가져오죠.

우리의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이웃의 이면을 읽는 것이고요.
거기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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